땅주인 바뀌니 '헐값 임대료' 못 참겠다?[판례방]
by성주원 기자
2025.04.05 12:30:00
■의미있는 최신 판례 공부방(20)
대법, "임대료 동결 특약 ''등기''없인 효력 없어"
수십년 된 계약도 새 소유자에게 주장 불가
장기 부동산 계약, 등기만이 3자 대항력 보장
[하희봉 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토지를 매입했는데 수십년 전부터 송전탑 같은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 사용료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면 새 주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최근 대법원은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오랫동안 땅을 빌려 쓰기로 하면서 ‘앞으로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더라도, 그 약속이 등기되지 않았다면 새로운 땅 주인에게는 효력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대법원 2024. 11. 14. 선고 2024다268997 판결).
사건의 발단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력(015760)공사(피고)는 경남 양산시의 한 토지 소유자와 지상권 설정 계약을 맺었다. 송전탑 등 전기 공작물을 설치하고 사용하는 대가로, 해당 시설물이 존속하는 기간(사실상 영구) 동안의 총 지료 6000만원가량을 한 번에 지급하기로 했다. 계약서에는 “지상권 존속기간 중 지료를 증액하지 아니한다”는 특약도 명시했다. 이 지상권 설정 사실과 지료 총액은 토지 등기부에 기재되었지만, ‘지료를 증액하지 않는다’는 특약 내용은 등기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2015년, 원고는 강제경매를 통해 이 토지의 새 주인이 되었다. 원고는 1997년에 정해진 지료가 현재 토지 가치에 비해 너무 낮다고 판단했다. 이에 원고는 먼저 토지보상법을 근거로 한전에 토지 매수를 청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법 제286조에 따라 지료를 현실에 맞게 올려달라고 예비적으로 청구했다.
1심과 2심 법원은 원고의 지료 증액 청구를 기각했다. 이유는 한전과 전 소유자 간에 ‘지료 부증액 특약’이 있었고, 이 특약을 유지하는 것이 신의칙에 반할 정도의 현저한 사정 변경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즉, 계약 당시 지료를 올리지 않기로 약속했고, 세월이 흘러 땅값이 올랐다는 사정만으로는 그 약속을 깰 만큼의 특별한 사정 변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특히 항소심(부산고등법원)은 원고가 “부증액 특약이 등기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소유자인 나에게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한 데 대해, 지료 부증액 특약은 등기 없이도 지상권 계약의 내용이 되어 새로운 소유자에게 대항할 수 있고, 다만 신의칙에 반할 정도의 사정 변경이 있다면 예외적으로 증액이 가능하지만 이 사건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지료 부증액 특약’의 등기 여부에 주목했다.
민법 제286조는 땅값 변동 등으로 지료가 상당하지 않게 되면 당사자가 증감 청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한편, 지료 액수나 지급 시기 등에 관한 약정은 등기해야만 토지 소유권이나 지상권을 나중에 넘겨받은 제3자에게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지료를 올리지 않기로 하는 특약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지료 부증액 특약’이 등기되지 않았으므로, 한전은 이 특약을 새로운 소유자인 원고에게 주장할 수 없다고 명확히 했다. 따라서 원심 법원이 특약의 유효성을 전제로 ‘신의칙에 반할 정도의 사정 변경’이 있는지를 따진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대법원은 원심이 특약의 등기 여부와 그 효력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보고, 예비적 청구(지료 증액 청구)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부산고등법원은 부증액 특약의 존재와 무관하게, 현재 시점에서 이 사건 토지의 지료가 민법 제286조에 따라 증액될 필요가 있는지, 즉 조세 부담이나 땅값 변동 등으로 인해 기존 지료가 상당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다시 심리해야 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부동산 권리 관계에서 ‘등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특히 지상권처럼 장기간 지속되는 계약에서는 지료 증액 여부와 같은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계약 당사자 간에는 유효했던 약속이라도, 등기부에 기재되지 않으면 바뀐 소유자에게는 그 효력을 주장하기 어려울 수 있다.
기업이나 개인이 토지에 장기적인 권리를 설정할 때는 계약서 작성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물론, 지료 액수, 지급 방법, 증감 여부 등 주요 약정 사항을 반드시 등기하여 제3자에 대한 대항력을 확보해야 예상치 못한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 반대로 토지를 매입하는 입장에서는 등기부상 권리뿐만 아니라, 등기되지 않은 약정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권리 분석 및 가치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 거래와 권리 설정에 있어 등기의 공시 기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특허청 특허심판원 국선대리인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