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반도체 보조금 곳곳 '지뢰밭'…"수익·기술 유출될라" 우려

by김응열 기자
2023.03.05 16:01:12

상무부 "예상 초과한 이익, 美와 공유"…생산시설 접근 허용 기업 우대도
반도체업계 "기업 노력해 번 돈…공장도 대부분 대외비, 기술 유출 우려"
업황 안 좋은데 中 투자도 금지…"美 과도한 경영 침해, 중국보다 더해"

[이데일리 김응열 기자]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 투자 기업의 보조금 지급 조건을 공개하자 반도체업계에선 경영 침해가 지나치다는 하소연이 쏟아진다.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으로 대미(對美) 투자가 불가피해졌는데, 투자를 유인하기 위한 보조금은 지급 조건 때문에 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일 반도체업계는 미국 상무부의 반도체 지급 조건이 기업 경영에 불합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을 받아도 남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미국이 중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토로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도 “미국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그저 황당할 뿐”이라며 “이 정도의 조건이면 자유시장경제에 어긋나는 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지원법 서명 행사에 참석한 모습. (사진=AFP)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반도체지원법상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 절차를 안내하면서 △경제·국가 안보 △사업 상업성 △재무 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 개발 △사회공헌 등 6가지 심사 기준을 소개했다. 우리 기업 중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005930)는 보조금 신청 대상에 해당한다. SK하이닉스(000660)도 미국에 패키징공장과 연구개발(R&D)센터를 건립할 예정이다.

◇보조금 지금 조건 중 반도체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건 재무 건전성 항목이다. 기업이 당초 예상한 것보다 초과이익이 발생할 경우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상무부는 보조금을 1억5000만달러(약 2000억원) 이상 받은 반도체기업이, 보조금 신청시 제출한 예상수익보다 많은 이익을 거두면 일부를 미국 정부와 공유하도록 했다. 공유 한도는 지원받은 보조금의 최대 75%다. 초과이익의 구체적 내용은 이달 중 발표할 예정이다.

상무부는 엄격한 보조금 심사를 위해 재무 건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수익성 지표와 예상 현금흐름 전망치 등 상세한 회계장부도 요구했다. 주요 생산 제품과 생산량 등도 제출 대상이다.

기업의 초과이익 창출에는 보조금을 바탕으로 한 투자 효과도 있지만, 기술력이나 원가 경쟁력 개선 등 기업의 자체적인 노력도 영향을 미친다. 초과이익을 공유하라는 상무부 요구는 기업 노력을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게 관련업계의 우려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열심히 해서 돈 벌었더니 이를 토해내라는 것”이라고 했다.

제조원가나 제품별 재고 등 민감한 영업비밀이 유출되는 것도 걱정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우리 기업들이 가장 위험한 건 이익공유”라며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영업비밀이 외부에 유출돼 고객사나 경쟁사에 들어가게 되면, 향후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가격 협상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는 시설 접근을 허용하는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 혜택을 우대한다는 조건도 문제가 있다고 봤다. 반도체 장비, 라인 배치 등 공장 내의 대부분 시설이 사실상 영업비밀이라는 것이다. 상무부는 미국 국방부에 필요한 반도체 공급에 협력하는 것은 물론 국방부 실험과 생산 등 국가 안보 프로그램에 반도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을 허용할 의사가 있는 기업을 원한다고 밝혔다. 보조금 혜택을 받은 기업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는 방침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팹(공장) 안에서 어떤 장비를 쓰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배치하는지도 대외비 사항”이라며 “수율과 연관되는 영업비밀을 공개하라는 건데,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고 호소했다.

상무부가 아직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도 관건이다. 보조금 수혜 기업은 중국 등 우려국에서 10년간 첨단 반도체 시설 투자를 해선 안된다. 레거시(구공정)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존 시설은 규제하지 않지만, 생산능력을 확대하더라도 대부분은 중국 내수용이어야 한다. 유관 산업의 빠른 발전과 이에 따른 첨단 반도체 수요 증가 등을 고려하면, 향후 중국 공장에서 낼 수 있는 수익은 제한적이다.

이규복 반도체공학회장은 “자율주행차 등 반도체를 요구하는 산업은 첨단 제품을 필요로 하는데, 중국에서 이런 제품을 만들기는 어려워질 것”이라며 “레거시 반도체를 만드는 중국 공장에서는 매출 감소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외에도 상무부는 기업에 부담이 되는 조건을 곳곳에 넣었다. 상무부는 수혜 기업이 직원들의 숙련도와 다양성 확보에 힘써야 한다(인력 개발)며 경제적 약자 채용 계획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또 1억5000만달러 이상의 지원금 신청시 공장 직원과 건설노동자에 보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였다.

상무부는 기업의 사회공헌 의지도 점검하기로 했다. 미국산 건설자재를 사용하는 것과 더불어 R&D 시설 건설 여부도 본다.

상무부는 기업이 투자를 계속해 생산시설을 개선하고 공장을 장기간 운영할 수 있는지(사업 상업성), 사업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환경 등 관련 규제를 통과할 수 있는지(기술 준비성) 등도 판단한다.

상무부가 내건 보조금 지급 조건에는 공장 운영에 부담을 주는 내용이 가득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을 대신할 선택지가 없다. 보조금 지급 조건이 외국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탓에, 우리 정부가 목소리를 낼 공간도 좁다. 기술 유출 우려가 적은 국내 투자가 최선책이지만, 우리나라 투자 환경이 충분하지는 않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K칩스법’도 제대로 통과가 안되는 상황”이라며 “미국 보조금 지급의 구체적 조건이 나오기 전까지 면밀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왼쪽) 평택 반도체 공장과 SK하이닉스 이천 본사.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