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상하이지사 기자
2010.06.03 10:35:42
[이데일리 상하이지사] 상하이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된지는 아직 만 20년이 안될만큼 현대 중국 증시의 역사가 짦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 하지만, 1850년대 청(淸)나라때, 이미 주식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때부터 중국은 거품 붕괴의 역사를 경험한다. 청나라 말기때부터 시작된 중국 주식시장의 역사를 한번 짚어보기로 하자. (편집자주)
과열국면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런던시장의 천연고무 주식이 1910년 6월, 돌연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당시 전세계 금융중심인 런던에서 이 소식이 전해짐과 동시에 상하이의 천연고무 주식 역시 급락한다. 한때 1675량에 달했던 한 천연고무 주식이 105량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2000년, 코스닥 광풍 이후 조정장에서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은 주식들이 바닥없이 추락한 것을 상상하면 될 듯 하다.
천연고무 주식 중 약 80%는 중국 상인들이 사들였기에 서양인들보다 중국 상인들의 손실이 상대적으로 컸다. 런던시장의 소식을 미리 접한 서양인들은 한발 앞서 주식을 내다팔기 시작했고 당시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 상인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증시의 큰 손이었던 정원전장(正元錢莊)의 천이칭(陳逸卿)은 200만량, 쟈오캉전장(兆康錢莊)의 다이쟈바오(戴嘉寶)는 180만량의 손실로 인해, 1910년 7월 21과 22일 잇따라 부도를 맞았다.
증시 폭락 후, 천연고무 주식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던 8개 전장(錢莊)이 연쇄 도산, 당시 상하이 금융가는 공황상태가 된다. 이들이 외국은행에서 빌린 돈은 139만량. 이때 91개사 전장 중 천연고무 주식 폭락으로 인해 수많은 전장이 연쇄도산했고 문제가 발생한 대출금액은 2000만량에 육박했다. 그 무렵 청나라의 1년 재정수입이 약 8000만량이었으니 당시의 부실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상하이 금융가가 이때만 해도 붕괴 국면까지는 가지 않았다. 상하이 금융계의 거두인 웬펑룬은호(源豊潤銀號), 이샨웬표호(義善源票號)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실력은 청말 중앙은행 역할을 하던 대청은행(大淸銀行)에 뒤지지 않아, 이들만 쓰러지지 않는다면 유동성 위기 크게 확산되지 않고 진정될 수 있었다. 웬펑룬과 이샨웬은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본격적인 시장자금 지원에 나섰고 관부 역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상하이의 행정장관인 차이나이황(蔡乃煌)은 청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고 중국 금융기관이 이들 외국은행으로부터 350만량을 빌리도록 긴급 조치한다. 1900년대초, 상하이 은행계를 주름잡고 있던 외국은행은 HSBC, 씨티은행 등의 9개 외국은행. 이들 역시 시장금리에 못미치는, 연간 4%에 달하는 저리로 자금을 중국 금융기관에 수혈했다. 이런 조치들에 따라, 9월이 오기전까지는 위기국면은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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