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시골청년 몰락 뒤에 망가진 역사 있었네
by오현주 기자
2012.07.27 10:11:45
연극 ''전명출 평전''
순박했던 영농후계자가
4대강 사기꾼 되기까지
현대사에 휘둘린 삶 조명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골조만 올린 우사에 겨우 매달려 절규하는 이 남자, 전명출이다. ‘살려 달라’ 애걸이다. 2007년 겨울 4대강 사업 예정지인 낙동강 언저리. 오가는 이가 아무도 없다. 지금처럼 그가 죽기 살기로 매달린 것도 세 번째라는데. 그 사정이 궁금하니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겠다. 그런데 첫 장면이 심상치 않다.
1979년 경남 합천의 영농후계자 전명출이 멍석말이를 당하고 있다. 마을서 재배한 마늘 50접을 훔치다 발각된 것이다. 친구인 이장은 매질 50대로 마을의 평화와 질서를 다잡자고 했다. 멍석말이 후 전명출은 결국 야반도주를 결심한다. 소 20마리 살 돈만 모아 돌아오리라. 고향을 떠나 아내 순님과 함께 생면부지 도시로 찾아들던 그날은 1979년 10월26일. 30년간 이어진 ‘전명출 평전’은 궁정동에 울린 총성과 함께 시작됐다.
“농촌은 끝난 기라!” 전명출이 평전의 서막에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자못 비장했다. ‘정주영’으로 롤모델을 갈아탄 그가 찾아든 곳은 울산의 공사판이다. ‘노가다’ 용어 외우기에 바쁜 시간, 얼마간은 편해보였다. 그런데 그를 또 한 번 흔드는 역사가 펼쳐진다. 경남 합천 출신 ‘전 장군’이 집권을 한 것이다. 합천 출신 영농후계자던 전명출에게 덜컥 ‘빽’이 생겼다. 1년도 안 된 신참이 ‘십장’으로 고속승진을 하더니 이내 지방건설사 사주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 비리와 야합이 점철된, 비틀린 야망과 부정한 성공이 화려하게 예고되는 순간이다.
“집은 건물이 아닙니더, 과학입니더!” 이 정도면 두 번째 장의 캐치프레이즈가 될 수 있을까. 전명출은 집을 지어 돈을 벌고, 자제를 빼돌려 돈을 벌고, 땅값이 올라 돈을 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두 번째 야반도주를 감행할 처지에 놓인다. 그가 지은 아파트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1990년 여름의 일이다.
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연극 ‘전명출 평전’은 평범한 한 인물이 처절히 망가져간 나락의 소사다. 소시민이 역사라는 벽, 그것도 한국현대사의 핵이 들어 있는 그 시점에서 어떻게 서글픈 자멸을 맞는가를 풀어낸 블랙코미디다. 웃음을 자극하지만 편한 웃음은 있을 수 없다. 어차피 누구를 세우든 마찬가지인 탓이다.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 내던져진 소시민이 그 안에서 어찌 휘둘리며 살아갔는가를 보이기로 작정했다면 말이다.
신선한 소재는 아니다. 역사의 회오리에 무너지는 사람들이야기 자체가 그렇다. 그러나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그 드라마를 빛낸 건 12명 배우들의 연기력, 특히 대사에 붙인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맛이다.
‘이날 이때 이즈음에’ ‘한중록’ 등 사극을 토대로 정치사회현실을 고발해온 작가 백하룡의 첫 현대극이다. 그 글솜씨에서 페이소스 짙은 장면을 꺼내 굴곡진 비애를 만들어낸 건 박근형 연출의 힘이다.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 ‘너무 놀라지 마라’ 등 절박함에 몰린 소시민들 사는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엮어온 그가 또 한 번 생생한 입체극을 만들어냈다.
“뭐가 이리 엉켜버렸노. 금수 같은 시대….” 평전의 마지막 장은 4대강이다. 고향으로 잠시 돌아간 그가 마을 하천을 4대강 개발지라 속이며 지인들의 목돈을 기어이 뜯어낸 장면이다. 그리고 되감아간 처음. 발을 헛디뎌 우사에 매달려버린 그를 다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까지 전명출을 지킨 건 한 평생 그에게서 버림 받다시피 한 아내 순님이었다. “시절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거여. 그게 순리인 기라. 잘 가이소 여보야.” 약하디 약한 결론이다. 하지만 그조차 부실한 현대사가 빚어놓은 이력에 다름 아니라는 걸 안다.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29일까지.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