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반도체 왕국서 매물로 전락…돌파구 못찾는 겔싱어

by양지윤 기자
2024.09.22 17:29:14

퀄컴, 인텔에 인수 타진
모바일 칩 회사, 반도체 회사 인수 '격세지감'
구원투수 겔싱어, 33조원 쏟아부었지만 경쟁력 회복 요원
고강도 구조조정 예고…"적대적 M&A·주주행동주의에 더 취약"
"내년 생산 차세대 칩 성공 여부가 관건"

[이데일리 양지윤 기자] 한때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반도체 왕국’ 인텔이 모바일·인공지능(AI) 칩 경쟁에서 밀리면서 퀄컴에 매각될 처지로 내몰렸다. 팻 갤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021년 인텔에 복귀하면서 실추된 기술 리더십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가 지휘봉을 잡기 전 이미 모바일과 AI 반도체 수요를 놓친 데다, 지지부진한 턴어라운드와 높은 비용부담을 해결할 목적으로 직원 수천명을 내보내며 인재 유출도 이어지고 있어 당분간 긍정적인 시그널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펫 겔싱어 인텔 CEO (사진=AFP)
지난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모바일 칩 강자 퀄컴이 인텔에 인수 제안을 했다고 보도했다. 인텔의 시가총액은 이날 기준 931억9100만달러(약 125조원)로,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경우 최근 수년간 이뤄진 인수합병(M&A)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거래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이 퀄컴의 인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향후 반독점 규제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최종 인수의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모바일 칩 회사가 종합 반도체 회사 인텔을 인수한다는 구상 자체는 그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텔 경영진의 전략적 실수와 예상치 못한 AI 열풍이 인텔의 운명을 바꿔놨다고 WSJ는 지적했다. 모바일 반도체 수요를 놓친 데다 AI 칩 시장에서도 뒤처지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안젤로 지노 CFRA 리서치 분석가는 “지난 2~3년간 AI로 전환은 인텔에 큰 타격을 입혔다”며 “인텔은 적절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인텔은 과거 마이크로소프트(MS)와 함께 ‘윈텔(윈도우+인텔) 동맹’을 바탕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도 PC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를 수성해왔다.



그러나 PC 시장에 안주하면서 모바일 칩 시장 성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2010년대 이후로는 주력인 PC·서버용 CPU 시장에서도 경쟁사 AMD가 바짝 추격해오며 시장 점유율을 계속 빼앗겨 왔다. 여기에 AI 열풍이 불고 있는 시장 변화도 읽지 못하면서 엔비디아가 장악하고 있는 AI칩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평가다.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았던 ‘올드보이’ 겔싱어 CEO의 책임론도 나온다. 그가 엔비디아발(發) AI 열풍에 따른 폭발적인 칩 수요 성장세를 예상하지 못한 채 비용이 많이 드는 턴어라운드 전략을 추구하면서 반도체 경쟁력 회복을 더디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텔은 지난 2021년 파운드리 시장에 복귀하면서 최첨단 공정으로 TSMC, 삼성전자(005930)와 경쟁하겠다고 선언하며 지난 2년간 250억달러(약 33조원)를 쏟아 부었지만, 현재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글로벌파운드리와 타워세미컨덕터 등 인수를 통해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발판 마련에 나섰지만 M&A는 결국 무산됐다.

급기야 겔싱어 CEO는 내년에 1만5000명을 해고하며 100억달러(약 13조3600억원) 규모 비용을 절감하고, 주주 배당금을 폐지하겠다는 극약처방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하다. 대규모 비용 절감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주가 하락으로 적대적 M&A 위험이 증가하고 주주 행동주의 펀드 등의 공격에 더 취약해 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서다.

스테이시 라스곤 번스타인 리서치의 애널리스트는 “인텔의 미래는 내년 생산될 것으로 예상되는 차세대 칩 제조 기술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며 “기술 리더십을 회복하면 수익률을 개선하고 고객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