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와 정조, 감춰진 진면목

by김용운 기자
2011.12.15 11:07:24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이덕일|440쪽|역사의 아침)
정조의 생각(김문식|272쪽|글항아리)

☞ 이 기사는 12월15일자 이데일리신문 27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한여름 뙤약볕에 놓인 뒤주에 갇혀 죽었기 때문이다. 반면 사도세자의 아들은 왕위에 올라 치세를 이뤘다. 바로 정조다. 부자의 상반된 운명은 누구나 알지만 그들의 감춰진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보며 쓴 기록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성격이 괴팍했고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런 상극이 만나 초래한 비극이란 것이다.
 
학창시절 이 부분에 대해 배웠을 때 저자는 ‘영조는 왜 아들의 병을 고치지 않고 뒤주에 갇혀 죽게 했을까’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결과적으로 혜경궁 홍씨의 시각에서 사도세자를 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조선 당파를 공부하며 ‘영조실록’과 ‘정조실록’ 등을 통해 알게 된 사도세자의 모습은 달랐다. 사도세자는 세손이었을 때부터 영특했으며 조정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조부인 효종을 닮아 북벌을 꿈꿨고 세자로 책봉된 이후 영조를 도와 국정을 조율할 정도로 아버지의 신임도 받았다.

책은 ‘한중록’과 다른 시각에서 사도세자의 삶과 그가 지녔던 꿈을 꼼꼼히 담으며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사도세자는 비운의 세자가 아니라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왕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후기 르네상스를 이룬 정조의 원동력이 아버지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아들의 효심으로 본 것은 설득력이 있다.




“진실로 불후의 업적이 되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인쇄에 부칠 힘이 없기에 운각에 보내어 간행하게 했다. 아, 이것이 어찌 그의 공로에 보답하는 것이겠는가.”

1783년 정조는 남유용의 문집 서문에 이같이 적었다. 남유용은 정조가 세 살 때 만난 첫 스승이었다. 정조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가르친 첫 스승을 잊지 않고 친히 서문과 함께 책 간행을 명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스물다섯 살에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정조는 조선 후기 최고의 개혁군주로 평가받으며 제위 기간 동안 치적을 쌓았다. 그렇지만 막상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은 많이 공개되지 않았다.

정조연구 전문가인 저자는 정조에 대해 알면 알수록 뛰어난 자질을 지녔던 군주라고 평가한다. 뛰어난 학자였고 의견이 다른 신하들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정국을 주도하기도 한 노회한 정치가였다. 무엇보다 정 많은 인간이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와 최근 발굴된 ‘심환지 별지’ 등을 통해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글들이 차곡히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