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달러짜리 ''mp3 가이드''와 시드니 골목골목 여행하는 법
by조선일보 기자
2008.04.17 11:46:00
[조선일보 제공] 뾰족뾰족 솟은 건물은 오페라 하우스, 그 옆의 둥그런 다리는 하버 브리지(Harbor Bridge) 아니던가. 호주 시드니(Sydney)는 가본 적도 없는데 식상한 느낌이었다. '근사한 증명사진'을 넘어서는 감동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시큰둥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호주의 한 젊은 택시 기사 콜린 게이븐씨를 여행 가이드로 채용했다. 시드니에서 나고 자라 골목골목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고 했다. 이 현지 가이드의 채용 비용은 9.95달러(1달러=984.50원)란다. 실제로 사람이 나오는 건 아니고, 최근 세계 자유 여행객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mp3 가이드 얘기다. '투어캐스터(www.tourcaster.com)'에서 다운로드 받은, 게이븐씨의 1시간30분짜리 mp3 여행가이드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 부근을 천천히 걸어봤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산책은 중간중간 쉬고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오후 8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2층으로 된 전철(기본 요금 2.40호주달러(1호주달러·AUD=911.92))을 타고 '서큘러 키(Circular Quay·원형 부두)' 역에서 내렸다. 10분 정도 걸으면 그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한다. 정작 오페라를 관람하는 사람보단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더 많은 이 건물이 시드니 산책의 시작점이다. "그다이('Good day'의 호주식 발음)!" 게이븐 씨의 인사를 들으며 오페라 하우스를 죽 둘러보고 부두 쪽으로 이어진 길을 걸었다. 빛 구슬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바다와 건너편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 다리 '하버 브리지'를 구경하고 있자니 게이븐씨가 바닥을 보라고 했다. 20~30걸음마다 동그란 금속판이 박혀 있고, 거기엔 각각 다른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부두를 지나 그 건너편 '더 록스(The Rocks)'까지 이르는 산책로는 '작가의 길(Writer's Walk)'이라고 불린다.
| ▲ 오페라하우스와 가까운 부두 서큘러 키에서 바라본 하버 브리지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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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관세청 건물 "커스텀즈 하우스"를 개조한 시드니 시립 도서관 1층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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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스텀즈 하우스 5층 "카페 시드니"의 송아지 스테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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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큘러키 동·서로 난 산책로엔 호주와 관련된 유명작가들의 문구가 군데군데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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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가끔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움베르토 에코)' '호주의 역사는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처럼 들린다(마크 트웨인)' 등 유명 작가들이 호주에 대해 적은 글들이 눈에 띈다. 궁금하긴 하지만 화창한 햇살이 쏟아지는데 바닥만 보고 걸을 수는 없는 법. 게이븐 씨가 "편하게 걸으라"며 동판에 적힌 문구를 하나하나 읽어준다.
오페라 하우스를 등지고 10분 정도 걸으니 다시 서큘러 키에 닿았다. 미라바 호텔 2층에 있는, 전망 좋은 'ECQ 바(02-9256-4000·www.miravahotels. com.au)'에서 호주 맥주 리틀 크리에이처스(Little Creatures·8AUD)로 목을 축인 후 게이븐씨의 안내에 따라 부두 뒤쪽 알프레드 스트리트(Alfred St.)를 건너 옛 관세청(Customs House) 건물로 들어섰다.
선명한 붉은 색으로 멋지게 꾸며진 6층짜리 건물은 선박을 통해 들어오는 물건에 관세를 매기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시드니 시립 도서관(02-9242-8555·www.cityofsydney.nsw.gov.au/library)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페 같은 분위기의 G층은 세계 각지의 신문과 잡지를 뒤적이는 사람들로 여유로운 분위기. 1, 2층은 자유롭게 책을 펼쳐볼 수 있는 도서 열람실인데 무선 인터넷을 무료로 쓸 수 있게 해뒀다. "전망으로 치면 시드니 최고로 꼽힌다"는 5층 '카페 시드니'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테라스 쪽에 앉으니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버섯을 곁들인 등심 스테이크 39AUD, 바닐라 아이스크림 16AUD.
커스텀즈 하우스를 나와 시내 구석구석을 좀 걸어보기로 했다. 영 스트리트(Young St.)를 따라 올라가다 브리지 스트리트(Bridge St.)를 건너면 시드니 박물관(Museum of Sydney·02-9931-5222·www.hht.net.au/museums/mos)이 나온다. 시드니의 첫 정부 청사 건물을 개조한 이 박물관에는 영국서 건너온 죄수로부터 시작된, 이 도시의 초기 역사에 관한 자료들이 많다.
"잠시 이어폰을 빼고 박물관 앞 나무 기둥들 사이를 걸어보세요. 작은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면서요." 박물관 앞뜰에 설치된 27개의 나무 기둥은 영국 조각가 재닛 로렌스와 시드니 원주민 출신 피오나 폴리가 함께 만든 작품 '나무의 경계(Edge of the Trees)'다. 얼핏 보면 그저 그런 나무토막들 같은데 기둥 사이를 살금살금 걸으니 새 소리, 휘파람 소리,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몇몇 기둥에는 작은 홈을 파서 깃털, 가죽, 돌멩이 같은 숲의 '선물'들을 넣어놓았다. 번화가에 세워진, 손바닥만한 숲의 아이콘인 셈이다.
박물관과 브리지 스트리트, 커스텀스 하우스 주변에는 노천 카페가 많다. 오후 5시가 넘으니 동료들과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쾌활한 시드니 샐러리맨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동그란 테이블 주변에 삼삼오오 둘러서서 '근무 후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려는가 보다.
브리지 스트리트를 건너 다시 서큘러 키로 돌아갔다. 오페라 하우스쪽 길이 아닌, 부두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난 '작가의 길'을 다시 따라 걷는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산책로 옆의 둥근 가로등과 하버 브리지에 노란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페라 하우스도 어느새 부드러운 야간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 길에도 작가들의 '호주 이야기'는 계속됐다. 해 지기 전 이 길에 닿았다면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02-9245-2467·www.mca.com.au)에 들러봐도 좋겠다. 오전 10시~오후 5시 문을 열고 입장료는 무료다.
길을 따라 끝까지 걸으면 '더 록(The Rock)'이라는 표지가 크게 보인다. 호주 이민자의 첫 배가 정박했던 곳인데, 지금은 해외로 나가는 페리(ferry)를 위한 부두로 쓰인다. 반나절 시드니 산책을 마무리하기엔 오페라 하우스의 야경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크루즈 바(Cruise Bar·02-9251-1188·www.cruisebar.com.au)'가 제격이다.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과 보석 같은 바다, 이 나라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사랑합니다.' 게이븐씨는 마지막으로 호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다는 도로시 맥킬라의 시 '나의 조국'을 읽어줬다. 호주 스파클링 와인 도메인 샹동(Domaine Chandon·한 잔 12AUD)를 마시며 어느새 친구처럼 느껴지는 게이븐씨와도 작별을 고했다.
mp3만 있다면, 모르는 여행지에서도 관광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음성 파일을 다운 받아서 mp3 기계에 담아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여행을 하는 것이다. 다만, 한국어로 된 시드니 mp3 가이드가 없는 것은 아쉽다. 영어권에서 생활해봤거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토익(TOEIC) 시험 준비로 영어 듣기에 자신감이 붙지 않았다면 호주 억양이 약간 있는 가이드의 얘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는다. '투어캐스터(www.tourcaster.com)' 사이트에선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표시한 지도를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데, 이걸 미리 인쇄해가면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