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⑪이동진 HSBC 부지점장(상)

by정명수 기자
2001.05.18 13:26:54

[edaily] 우리나라 채권시장에 ‘딜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다. 그 전까지 기관투자가들은 채권이 발행되면 적당한 수익률에 사서 만기까지 보유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투자전략이었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인 HSBC의 이동진 부지점장은 80년대 중반부터 채권 딜링을 시도한 몇사람중 한명이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 용어조차 없었던 ‘데이트레이딩’이나 금리선물 투자까지 시도하면서 채권시장을 주도한 큰 손이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면서 선진금융시장에서 활용되는 금융기법들을 한국 시장에 도입한 개척자인 셈이다. 채권시장의 많은 사람들은 93년 금융실명제 당시 채권수익률의 방향을 돌려놓는데 외국계 은행인 BTC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 이 부지점장이 BTC에서 채권딜링을 담당했다. 이 부지점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스스로 “다소 과장됐다”고 말했지만 시장에 쇼크가 왔을 때 대처하는 원리로서 ‘역발상’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후배 채권딜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부지점장이 원래 채권딜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 분야에 흥미가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BTC에 입사해서 13년이상 채권시장에 몸담게 됐다. 지금은 직접 딜링을 하기보다는 딜러들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장에 대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고비때마다 매매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채권시장 입문 초기에는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거래방법을 도입해 하나하나 실행해보는 것이 재미였다면 지금은 경험과 경륜으로 시장 방향을 예측해보는 즐거움이 있는 듯했다. 그는 채권딜러라는 직업이 시간을 다투며 수백억원짜리 채권을 사고 파는 긴장도가 높은 일이지만 여유를 잃지 않고 충실하게 임하는 것이 롱런하는 길이라고 충고한다. 그는 동로마사와 관련된 역사서를 번역할 만큼 역사학에 대해 아마추어 이상의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앞서 행하기 위해서 과거의 역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채권시장이 지금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이전부터 지금과 같은 시장을 꿈꾸고 먼저 행동했던 이 부지점장의 ‘채권인생’을 들어봤다.(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79학번이시네요. 미시간에서 MBA를 하시구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3월에 입학해서 2~3달 가량 다녔을까. 그리고 곧바로 미국으로 갔어요. 대학 4학년 때 시험을 보고 미국 여러 군데 대학에 입학신청을 했는데 허가서가 딱 한 통 날라왔습니다. 그곳이 바로 미시간이었죠.(웃음) 운이 좋았던 것이 그 무렵 처음으로 군 미필자가 유학을 갈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됐습니다. 83년에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85년 6월에 귀국했죠. <자동차와 마케팅의 꿈을 접고, BTC에 입사> -귀국해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귀국 후 바로 BTC(Bankers Trust Company) 서울지점에 입사했습니다. 사실 저랑 MBA를 같이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저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 취업하려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자동차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동차 회사도 면접을 봤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들을 알아봤죠. 하지만 군대문제 등이 겹쳐서 그런지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일단 귀국했죠. 돌아와서 몇 군데 원서를 냈는데 모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그 기업의 이사께서 “이 친구 일하도록 해”라고 말씀까지 하셨는데도 정식 공채기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락이 늦어지더라구요. 그 때 제가 원서를 넣은 외국계 은행 중 BTC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를 한 번 보더니 흔쾌히 “좋다. 내일부터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은행에서 일할 마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베개를 같이 쓰고 있는 사람과 그 당시 한참 연애중이었어요. 돈도 많이 필요했던 때라 오라는 곳을 망설일만한 여유가 없었죠.(웃음) 그래서 출근했습니다. BTC에서 몇 달 근무하고 6개월짜리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군 복무 시절 저를 물먹인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부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연락이 늦었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제와서 연락을 주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 일단 군대를 마치고나서 얘기해보자” 이상하게 대기업은 의사결정속도가 상당히 늦더라구요. 제가 “나는 MBA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대우를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당시 저는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어요. 보통 MBA 코스를 이수하면 파이낸스와 관련된 공부를 많이 하는데 저는 학창시절부터 마케팅과목을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겪어보려고 일부러 외국인 친구들와 어울리고 접시도 닦았습니다. 사실 군 복무를 마치고 BTC로 복귀하고 나서도 한두 군데 정도 면접을 더 봤습니다. 하지만 곧 결혼을 앞둔 상태였고 외국계 은행의 보수가 낮은 편도 아니라 직장을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13년 넘게 근무하게 됐습니다. BTC에서 맨 처음 기업금융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자금부를 새로 개편하면서 팀이 만들어졌고 그 때 새 팀장으로 오신 분이 현 JP모건-체이스의 CEO이신 홍기명 대표입니다. 그 분께서 같이 일해보자고 말씀하셔서 외환, 채권 딜러로 일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계은행은 이동이 잦습니다. 제 윗분들이 여러 곳으로 움직이시면서 빨리 책임업무를 맡게 된 겁니다. -BTC를 첫 직장으로 잡은 건 원래 계획과는 다른 일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채권시장에 입문하다> -자금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맨 처음 제 보스는 강정원 현 서울은행장이셨어요. 그 분 도와드리는 일을 했죠. 그 외 크레딧 분석 같은 일도 했구요. 창피한 말이지만 적어도 은행에 다닌다면 대출관계, L/C, 예금, 환전을 어느 수준이상으로는 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저는 입행 후 곧바로 자금부에 들어왔고 딜링업무만 계속해서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친구나 친척들이 사업한다고 L/C가 뭐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도 못해줬죠.(웃음) 개인적으로는 베팅을 좋아한다거나 노름에 관심있는 편은 아닌데 십년 넘게 딜링을 하게 된 것이 참 묘하다고 생각해요. -본격적으로 “채권만 한다”고 생각하신 건 언제인가요. ▲입사 초기에야 누구나 그렇듯 분야에 관계없이 업무보조를 많이했죠. 외국계은행이라고 해서 채권은 채권만 외환은 외환만 하는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제 기억으로는 88년 초 제 사수가 BTC를 그만뒀습니다. 그 후부터 제가 전담해서 업무를 추진했으니까 88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MBA를 마치고 외국계 은행에 입사하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동기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남았죠. 공부를 계속하지 않은 친구들은 증권사로 가기 시작하더군요. 85년 무렵이 증권사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주식이 뭔지 채권이 뭔지 가르쳐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외국계 은행도 제가 처음일 겁니다. -학부전공이 경제학이신데 전공결정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다른 전공에는 관심이 없으셨나요? ▲허허. 그러면 또 지나간 얘기가 나와야하는데. 당시 학제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문과생의 경우 법대, 경영대, 인문대, 사회과학대 등등의 단과대를 선택하는 거에요. 사회과학대로 입학했더니 그 안에 십여 개 정도의 전공과목이 있더군요. 정치, 외교, 사회, 신문 등등. 솔직히 경제에 관심이 있어서 간 건 아닌데 같이 입학한 고등학교 친구들이 경제학과를 많이 선택했습니다. 제일 좋은 과라고 하더군요.(웃음) -중동고를 졸업하셨군요. 당시에도 주먹으로 유명하던 시기였습니까. ▲저희 때는 아직 강남으로 이사가기 전이었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명했죠. 하하. 선배들 얘기 들어보면 뭐 더 엄청나더군요. -그럼 ‘싸움’에도 자신이 있으시겠군요. 모범생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학업성적과 상관없이 “하고싶은 일은 한다”는 생각을 하신 듯 한데요. ▲싸움요? 전혀 아닙니다. 하하. 보면 아시겠지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랑만 어울리지는 않았고요. 물론 고3 때는 공부에 파묻혀 있었지만 얌전한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한달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보는 스타일은 아니었죠. 고2 때까지는 성적에 그다지 많이 신경쓰지 않았어요. <”채권딜링”이라는 새로운 거래기법을 도입> -학부전공은 경제학이었는데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학과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전공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그 때 저보고 경제학과를 권유한 친구들은 다 경제학 교수가 돼 있어요. 어떻게보면 저는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에이 고등학교 때처럼 좀 놀다가 3~4학년 돼서 공부하지 뭐’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가진 편은 아니었거든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군요. MBA때도 마케팅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셨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네. 저는 학교에 남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가서 뭔가 일을 하고, 특히 무역업 같은 것 말이죠. 꼭 장사를 하지않더라도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흥미가 있었어요. 아버님께서도 무역업에 종사하셨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거죠. -딜링 룸에 있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고 비즈니스활동을 펼치는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인데요. 숫자들을 바라보면서 고민해야 되는 정적인 일이잖습니까. 활동적인 업무를 좋아하는 분이 딜링을 십년 먼게 해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언뜻 조화가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마케팅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손님을 따라나가는 일도 드물었으니까요. 그래서 곰곰 따져보면 ‘아 나는 마케팅체질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업무에 따라 제 성격이 바뀌어왔는지도 모르겠어요. 학창시절에는 분명 지금보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이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택한 걸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왜냐구요? 제가 원래부터 외국계 은행을 목표로 하고 BTC에 입사한 건 아니지만 들어와서 보니 외국계 은행의 채권 트레이딩은 저 혼자 하고 있더라구요. 당시 채권을 사고 판다는 딜링 개념에서의 트레이딩을 하는 곳은 외국계에서는 BTC뿐이었습니다. 그건 달리 말해 강 행장을 포함한 BTC 경영진들이 향후 트렌드를 예측했다고도 볼 수 있어요.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딜링을 하지않으면 어떻게 딜링이 가능한가요? ▲물론 혼자라는 것은 약간 틀린 표현이구요. 88년 무렵만 해도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죠. 저는 91년부터 채권거래 규모를 크게 늘렸습니다. 물론 지금 규모랑 비교하면 그리 많지 않은 액수겠지만 하여간 그 무렵에 채권을 크게하는 곳은 저희와 장기신용은행 정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해주시죠. ▲3000억~4000억원 정도 됐습니다. 장기신용은행은 팀을 갖추고 저희보다 좀 더 큰 규모로 했구요. 그 당시 연금, 보험, 투신 등 다른 기관들은 오직 한 가지 전략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만기까지 보유하는 “buy & hold” 죠. -그 때 딜링용으로 사용했던 주요 채권은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회사채가 최고였습니다. 시장의 벤치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장기채권은 회사채 3년이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지금이야 국채도 있고 예보채도 있고 장기채권의 종류와 수가 다양하지만 그 무렵 어디 그런 것이 있습니까. 회사채가 샀다 팔았다하기 가장 쉬운 채권이었고 채권이 나오기만 하면 투신사가 채권을 싹쓸이해갔죠. 물론 채권발행이 매일매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서 며칠 후에도 살 수는 있었습니다. -현재는 회사채등급이 무척 세분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은행보증/비은행보증 두 가지 분류 정도였죠. 무보증채권이 있긴 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80년대에는 은행들간의 차이가 없었으니까 증권사 브로커들에게도 “은행보증 채권 얼마얼마 있습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됐어요. 그것이 어떤 은행인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채권을 샀다가 팔 수 있는 유동성만 담보되면 어느 회사냐, 어느 은행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때니까요.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