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품에 안겼다, 수줍은 어린애처럼
by조선일보 기자
2008.03.20 10:55:00
[조선일보 제공] 흰 꽃의 터널을 이룬 매화나무 아래 한 아저씨가 쭈그리고 앉아 초록빛 풀을 들여다보고 있다. 형광 빛으로 점점이 피어있는 꽃 이름을 묻자 "그건 모르겠는디. 이건 전라도말로 곰밤부리 나물(별꽃나물)이라 하는 건디…." 쑥이 싱싱하고 좋아서 바로 뜯어 쑥국을 끓여 먹고 있단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배에서 회 쳐 먹는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매화 농원에서 쑥국을 끓여 먹는다니 어쩐지 수상쩍다.
| ▲ 보해 매실농원 "연애소설" 촬영지 부근의 매화 터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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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보해 매실농원 임순택 부장은 "저기…쑥을 마구 뜯어서 취사하는 분 있던데"라는 고자질에 허허 웃었다. "여기는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일년에 딱 한 달만 일반인에게 공개해요. 그래서 그동안은 꽃만 안 건드리면 무엇을 해도 안 막아요. 쑥 참 좋던데, 좀 뜯어가시지 그래요. 담엔 고기 사다 매화나무 아래서 좀 구워도 드시고."
| ▲ 경남 하동 녹차 밭에 핀 매화.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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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취순으로 유명한 보해가 운영하는 이 농원은 전남 광양의 '홍쌍리 매실농원'보다 개화일이 일주일 정도 늦다. 그래도 규모(46만2800㎡·약 14만평)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광양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지질을 높여준다고 해서 10여 년 전 자운영을 심었다는데, 어느새 나무 아래 빼곡하게 번식해 걸음걸음을 푹신하게 해준다.
영화 '너는 내 운명'서 은하(전도연)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 석중(황정민)과 보냈던 신혼 시절을 촬영한 곳이 바로 이 농원이다. 주차장에서 전망대를 지나 '너는 내 운명 촬영지'까지 이어지는 길이 가장 붐빈다. 묘하게도 이 지점을 지나면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한적해지니 매화가 뿜어내는 연한 향기, 그리고 어찌 알고 몰려 들어 꽃 사이를 누비는 벌들이 내는 붕붕붕붕 소리가 훨씬 잘 느껴진다. 영화 '연애소설 촬영지'란 표지가 붙어 있는 곳까지는 10분쯤 걸어갔을까.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한 깨끗한 매화 터널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이번 주 꽃 구경을 하려면 지금 한창인 매화에 집중하는 게 좋다. 1박 정도 각오한다면 남도를 가로지르는 2번 국도를 따라 해남에서 광양까지 '매화 기행'에 나서도 좋겠다. 해남서 광양까지는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결코 짧지 않은 길이지만 강진 벌교 순천 등에 들러 꽃 구경하며 쉬엄쉬엄 가다 보면 결코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벽으로 이뤄진 주작산 등산로 부근에 매화가 꽤 많다. 매실농원 만한 규모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마을 사이사이 동네 어르신들이 심어 놓은 매실들을 숨은 그림 찾듯 기웃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옛 물건 4000여 점을 전시한 '와보랑께 박물관' 주변엔 김성우 관장이 심은 250그루의 매화 나무가 정겹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흙 길로 유명하다. 강진군청 홍보팀 (061)430-3462
꼬막 생각이 난다면 잠시 벌교에 들르자. 옹기 체험을 할 수 있는 '징광다원'엔 주인 차정금씨가 가꿔놓은 매화 밭이 있다. 징광다원 (061)857-5064, www.jingkw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