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성곤 기자
2012.09.16 16:37:59
[고양=이데일리 김성곤 기자]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의 학창시절 꿈은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또 문제아였다.
문재인 후보 측은 16일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선출 직후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 실리지 않는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내용은 ‘문재인의 운명’ 출간 당시 집필은 했지만 책에는 미처 싣지 못한 원고다.
문 후보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과목이 제일 재미있었고, 성적도 제일 좋았다”며 “지금도 나는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한다. 처음 변호사할 때, 나중에 돈 버는 일에서 해방되면 아마추어 역사학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또 학창시절 정학을 당하기도 했던 사연도 눈길을 끈다. 문 후보는 학창시절 책에만 파묻힌 게 아니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물론 ‘노는’ 친구들하고도 어울렸다. 그러면서 술, 담배도 배웠다.
문 후보는 고교 시절 네 번의 정학을 당했다. 1·2학년 때 유급처지에 놓은 친구에게 시험답반을 보여주다가 처벌을 받았다. 또 고3 시절에는 술로 정학을 당했다.
문 후보는 중고교 때 이름 때문에 별명이 문제아였지만 나중에는 진짜 문제아가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문재인 캠프에서 공개한 뒷이야기
▲ 학창시절 1
고등학교에 들어가선 중학교 때보다 활달해졌다. 책에만 파묻힌 게 아니라 친구들과도 많이 어울렸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끼리도 어울렸고, 이른바 ‘노는’ 친구들하고도 어울렸다. 그러면서 술, 담배도 배웠다. 당시 경남고등학교는 술이나 담배를 금지하긴 했어도, 모른 척 용인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축구 같은 운동을 좋아해서 수업시간에 ‘땡땡이’ 치고 축구를 하기도 했다. 다양한 그룹의 친구들을 폭넓게 사귀었다. 학과공부에 신경 안 쓰고 다른 일에 빠져있긴 했어도 상위등수는 계속 유지했다. 부모님 입장에서야 ‘한 번도 제대로 공부하는 모습은 못 보겠는데, 성적은 그런대로 받아오네. 지 할 일은 하는구나’ 싶었던지, 별 간섭을 안 하셨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나를 어른대접 해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술 담배도 간섭을 안 했다. 담배의 경우 부모님 모르게 관리를 잘 했는데, 한번은 들키고 말았다. 무심코 교복 주머니 속에 넣은 채 옷을 빨아달라고 내놓았다. 나중에 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담배를 그대로 내 책상 위에 얹어두셨다. 속으로 크게 걱정하셨을 텐데 내색을 전혀 안 했다.
이후에도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별나게 굴거나 말썽을 부리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칙이나 규칙 같은 게 나하고 잘 안 맞았는지, 정학을 네 번이나 당했다. 동기들 가운데 나만큼 정학 받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1학년 때 한 번, 2학년 때 한 번 정학을 받았다. 두 번 모두 다른 친구에게 시험답안을 보여주다 들켰다.
1학년 때 답안을 보여준 친구는, 그 시험까지 망치면 유급당할 절박한 처지였다. 불쌍하기도 하고,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보여주다 걸리고 말았다.
2학년 때에도 딱한 사정으로 도와야 하는 친구가 있어 아예 시험지에 답을 다 적어서 통째로 넘겨줬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기만 보고 말았어야 하는데 사방에 돌려버렸다. 내 답안지가 빙글빙글 돌아가 나한테 한참 떨어져 앉아있는 아이 자리에서 발견돼 걸렸다. 마지막에 걸린 녀석과 내가 정학을 받았다. 세계사 시험이었는데 내가 100점을 받았다. 전교에서 유일한 만점이었다. 선생님에게 칭찬 받으면서 정학을 당했다. 그래도 순수했고, 즐거운 시절이었다.
▲ 학창시절 2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게 생겼다. 내가 다닌 경남고등학교는 걸핏하면 “한강이남에서 제일”이라 말할 정도로 일류 학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대학입시를 중시했지만, 요즘과는 달랐다. 공부는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했다. 입시과목이 대학마다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대는 입시과목이 전 과목이었지만, 연?고대만 해도 주요과목만 시험을 쳤다. 학생들도 요즘처럼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서클활동을 하기도 했고, 방학 때 무전여행이나 캠핑 같은 것도 했다. 고3쯤 되면 술?담배를 하는 학생도 꽤 있었다. 학교에서도 웬만하면 모른척했다. 술?담배를 하게 되면서 ‘노는 친구들’하고도 어울렸다. 축구를 좋아해 공차는 애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공부는 더 뒷전이 됐지만 친구들을 폭넓게 사귀게 됐다.
그러다 학교에서 처벌을 받기도 했다. 고3 봄 소풍 때 일이다. 대학입시 때문에 가을소풍이 없어서 학창시절 마지막 소풍이었다. 자유 시간에 친구들과 인근 마을에서 술을 사갖고 와 마셨는데, 그중 한 명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이 취했다. 들킬까봐 걱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합시간에 이 친구가 담임선생님 앞에서 인사불성 뻗어버렸다. 할 수 없이 함께 술을 마셨다고 이실직고한 후, 몇 명이 그 친구를 업고 병원에 갔다. 위세척까지 하고서야 깨어났다. 학교에서 처벌을 하니 마니 하다가 그래도 의리를 지켜 이실직고한 정상이 참작돼, 뻗은 친구만 정학 받은 것으로 끝났다.
그 후 여름방학 끝날 무렵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한 다음, 학교 뒷산에서 술 마시고, 담배피우며 고성방가 하다가 하필 당직을 하고 있던 지도부 주임 선생님에게 잡혔다. 그리고 떼거리로 유기정학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 내 별명은 ‘문제아’였다. 처음엔 그냥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는데, 그 두 번의 일로 진짜 문제아가 됐다.
부모님은 그런 일이 있는 줄도 까마득히 몰랐다. 어쩌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는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지만, 크게 엇나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지 모른 척 해주셨다.
▲ 학창시절 3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엔 지금처럼 대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만 돼도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 사회에서 고등학생들을 요즘처럼 어리게만 보지 않고 꽤 어른 대접을 해줬다. 4?19 전통이 아직 생생할 때여서, 중요 시국상황을 맞이하면 고등학생도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우리학교에서도 내가 2학년 때 전교생이 3선 개헌반대 데모를 하고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그 무렵 막 도입된 페퍼포그 차까지 출동해 교문을 막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그 일로 꽤 오랫동안 휴교를 했다. 한편 그해 초부터 고등학교에서도 교련이 실시됐다. 장기집권을 위해 학교를 병영화하고, 학생들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그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교련시험 때 백지 답안지를 집단으로 낸 일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크게 키워줬다.
▲ 역사학자가 될 뻔하다
나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과목이 제일 재미있었고, 성적도 제일 좋았다. 지금도 나는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한다. 처음 변호사할 때, 나중에 돈 버는 일에서 해방되면 아마추어 역사학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대학입시 때에도 역사학과를 가고자 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했다. 내 성적이 법?상대에 갈 등수라는 게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었는데, 입시공부를 등한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 특전사
공수특전사 편제는 일반 군대와 다르다. 1개 중대가 12명밖에 안 된다. 일반 보병부대는 통상 200~300명 가까이 될 텐데 우린 단 12명이다. 일종의 비정규전 특수 침투부대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단독으로 특수작전을 벌인다. 적진 내에서 저항세력을 규합해, 그들에게 자신의 전문분야별 교육까지 시키는 임무도 띄고 있다. 따라서 12명 가운데 화기 주특기 2명, 폭파 주특기 2명, 통신 주특기 2명, 정보작전 1명 등등으로 구성된다. 장교와 책임하사까지 포함해 단 12명이 내무반조차 함께 쓴다. 동고동락 공생공사다. 물론 내무반 생활은 1년에 1/3 정도이고, 연간 2/3 가량은 밖에 나가 훈련했다. 중대장도 훈련 나가면 모든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고, 당번병이나 참모병사 따위도 없다. 태권도를 할라치면 장교들도 자기 도복을 자기가 갰다. 그런 정신,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전우애가 좋았다.
보통 특전사 하면 야전훈련이나 천리행군 때 식량도 없이 살아있는 뱀이나 동물을 산 채로 잡아먹는 모습을 연상한다. 배고픔과 싸워야 하는 건 사실이다. 고된 훈련보다 고통스러운 게 배고픔이다. 하지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나도 뱀을 잡아 끓이거나 구워먹은 적이 있다. 허기질 때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날로 먹으면 기생충이 많아, 그대로 먹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실제 낙하훈련 하기 전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머리카락이나 손톱, 부모님께 드리는 글을 남긴다. 나중에 훈련이 무사히 끝나면 돌려줬다.
점프(공중낙하)도 공수훈련은 무척 힘들었지만, 그 후 자대에서 하는 점프는 할 만 했다. 부대 안에서 사역을 하느니 점프 나가는 게 더 좋았다. 공수훈련 마지막에 4번의 점프가 있었다. 첫 두 번은 보통점프, 세 번째가 야간점프, 네 번째가 무장점프였다. 첫 점프 나가기 전날 혹시 사고가 날 경우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남길 글을 머리카락, 손톱과 함께 봉투에 넣게 했다. 수송기를 타기 전에 군목(軍牧)이 기도도 해줬다. 내가 훈련받을 때 군목은 기도뿐 아니라 자신이 훈련병들보다 먼저 1번으로 점프를 하기도 했다.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 첫 점프 때 동기 중 한명이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자유낙하로 땅에 떨어져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옛날 군대 얘기라 요즘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미군과 ‘독수리훈련’이나 ‘팀스피리트 훈련’을 합동으로 하곤 했다. 점프도 함께 할 때가 있었는데, 미군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스포츠 하듯 편하게 했다.
낙하산도, 수송기 안에서 낙하지역 ‘5분 전’ 신호가 나오면 그때 비로소 착용했다. 수송기 안에서도 편하게 기다렸다. 반면 우리는 수송기 타기 전에 미리 낙하산을 착용하고 안전검사를 받았다. 수송기 안에서도 시종 차렷 자세로 옆 사람과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그러니 잔뜩 긴장된 가운데 점프하다 오히려 사고가 더 많이 났다.
얼마 전 인터넷에 내 군대시절 사진이 올라온 것을 봤다. 함께 군(軍)생활 했던 동기의 딸이 제공한 사진이라고 했다. 수소문해 그 동기와 실로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지금도 공수특전사 동기나 후배들을 가끔 만나 그 시절 얘기를 나누곤 한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군대 이야기에,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등을 주로 한다. 사실 군대 이야기를 쓰자면 책을 한권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군 제대 후 한동안 꾼 꿈이 ‘다시 군대에 가는 꿈’이었다. 군대생활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꿈속에서도 분명히 제대했는데 제대가 취소되든지 해서 다시 군대에 가게 되는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군대 갔다 온 사람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꾸는 악몽이었다. 의무 복무한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군대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나는 군대경험이 그 후의 내 삶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많은 일이 생전 처음해 보는 것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다 해낼 수 있더라는 경험이 나를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변호사를 할 때나 청와대에 있을 때 처음 겪는 일이 많았다. 내 개인적으로 처음일 뿐 아니라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을 때도 많았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부딪쳐 가야 했는데, 그럴 때 그런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됐다.
그런 경험 때문에, 나는 지금과 같은 징병제가 계속 유지된다면 신체검사등급 기준을 크게 완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즉 도저히 신체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입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물론 전제가 있다. 군대에도 체력을 요하지 않는 직무가 얼마든지 있으므로, 각자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직무를 적절히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군복무기간도 단축할 수 있고, 병역비리나 특혜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개병제(皆兵制) 정신에도 충실해져, 병역가산제 같은 논란도 필요 없어질 것이다.
▲ 아버지의 죽음
처음엔 아버지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어머니였지만, 우리를 두고 그렇게 일찍 떠난 아버지에 대해 아무 원망이 없었다. 평생을 그러셨다. 아버지가 돈을 못 벌어온다고 어머니가 타박하시거나, 그 때문에 서로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다. 원래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다만 사회비판 의식을 갖고 있던 분이었다. 가끔 <사상계>도 읽으셨고, 왜 한일회담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지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기억도 떠올랐다. 농촌을 살리는 성장을 모색해야 하는데 우리 농촌이 완전히 피폐화 됐다며 개탄하셨던 말씀도 기억난다. 말수 없는 분이 아주 드물게 그런 말씀 하신 게 어린 내겐 강렬하게 와 닿았다. 추억은 별로 없지만, 사실 아버지가 나의 비판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선비 같은 분이었다. 현실적응 능력이 별로 없어 그렇게 고생해 살면서도 평생 욕설 같은 것을 할 줄 모르셨다. 아버지가 아주 가끔 하신 최고의 욕은 “거, 이상한 사람이네”였다. 나도 평생 욕을 안 하고 자랐다. 알게 모르게 많은 걸 내 안에 남기고 가신 분이었다.
▲ 청와대와 서울생활
사생활을 아예 포기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민원이나 청탁, 혹은 구설을 우려해 일 이외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만나자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안 만나는 것이었다. 청와대 근무하는 동안, 동문회나 동기회 기타 사적 모임엔 가질 않았다. 집안 행사 같은 데도 거의 가지 않았다. 한번은 민정수석이 됐다고 대학 동문회에서 마련해 준 자리가 있었다. 나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고 축하패까지 준비했다는데, 안 갔다. 그 뒤에 재차 그런 자리를 다시 마련했다며 이번엔 꼭 오라는 요청이 왔다. 난감했다. 딱 축하패만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서 축하패만 받고 바로 나왔다. 미안한 일이었다.
또 한 번은 어느 부처 고위직에 있는 동창이 미리 약속이라도 된 듯 이호철 비서관에게 말을 하고는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다. 이 비서관이 혼자 들어와 “동창 ○○○가 오셨는데요” 하길래 “없다고 해라”라고 말했다. 이 비서관은 고지식하게 “없다고 하랍니다.”라고 그대로 전했다. 나와 이 비서관이 나눈 얘기를 밖에서 다 들은 그 동창은 참 민망했던 모양이다. 나를 방문할 만한 합당한 사유가 없으면 아예 없다고 하거나 만날 수 없다며 돌려보내겠다는 원칙을 세운 것인데, 인간적으로 미안했다.
만나야 할 사람을 사무실에서 만나는 경우에도 항상 문을 열어놓았다. 늘 조심하고 근신하고 절제하는 마음으로 긴장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