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정재웅 기자
2010.09.01 09:32:18
[이데일리 정재웅 기자] 현대차그룹이 계열 분리 10주년 기념 비전 선포식을 행사 당일 아침에 돌연 무기한 연기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그룹과 관련된 대형 행사를, 그것도 대외적으로 이벤트를 예고해 놓은 상황에서 전격 연기한 이유에 대해 다른 대기업들도 의아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황. 현대차 그룹이 택한 전격적인 조치의 배경에 대해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1일은 지난 2000년 공정거래위원회가 현대·기아차의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날. 따라서 이날은 현대·기아차만의 독자 노선을 걷게된 지 꼭 10년이 되는 의미 깊은 날이기도 하다.
이에 현대차(005380)그룹은 기획실을 중심으로 수개월전부터 계열분리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해왔다. 지난 10년간을 뒤돌아보고 향후를 대비한 미래 비전을 선포하겠다는 취지였다.
아울러 그룹 CI 선포는 물론 새로운 사가(社歌)를 선보이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차그룹의 위상과 마래를 한 눈에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행사 당일 이른 아침 이 행사가 전격 무기한 연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고위 관계자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기됐다는 소식이 들려와 무척 당황했다"고 밝혔다.
그룹의 미래 비전을 선포하고 모든 현대·기아차를 중심으로 모든 계열사가 협력해 진정한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거듭나자는 다짐을 하려 했던 '좋은' 행사가 돌연 급작스럽게 취소된 이유는 뭘까.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부를 중심으로 대·중소기업 상생을 강조하고 있는데 아직 해결해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비전을 선포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라는 최고 경영진의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의 전격 연기 결정은 정몽구 회장이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또 다른 관계자도 "10년 동안 현대차그룹이 크게 성장한 것은 맞지만 현 분위기에서 우리만 훌륭한 실적을 거뒀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기에는 솔직히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면서 "난제였던 기아차 임단협도 잘 끝마쳤고 이를 계기로 향후 협력업체 등과 상생하는 모습을 더욱 보여준 후에 선포식을 여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계열분리 10년만에 매출 100조원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지난 4월 기준 현대차그룹의 자산 총액은 총 100조7000억원으로 삼성그룹에 이어 국내 재계 순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룹 전체 매출은 94조6520억원, 순이익은 8조4290억원, 계열사 수만 무려 42개에 달할 만큼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도 이젠 해외 유명 메이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급성장,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현대차그룹의 위상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 현대차그룹은 이런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자랑스럽게 내놓지 못하게 돼 아쉽다는 표정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갑작스럽게 행사가 취소돼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지난 10년간 열심히 일해 이만한 성과를 거뒀다는 것을 구성원들이 공유하지 못하게 된 점이 가장 아쉽다"고 토로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고위 관계자는 "아무래도 정부에서 대기업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만큼 우리가 이만큼 잘했다고 내놓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며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보다 더 협력업체들과 상생해 더 좋은 성과를 낸 이후에야 우리의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