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자통법)③나무보다 숲을 보자

by김경근 기자
2007.04.12 10:30:00

`지급결제` 둘러싸고 증권·은행 대립 첨예
증권사 지급결제 허용에 CMA예금 논쟁도
"밥그릇 싸움은 안돼..소비자 편익 따져야"

[이데일리 김경근기자] "증권계좌 지급결제는 소비자 편의를 위한 것이다"
"증권사에 지급결제를 허용하면 금융기관 결제시스템 위험이 커지고 은행·증권간 벽이 무너진다"

자본시장통합법 국회 통과를 앞두고 증권업계와 은행업계 사이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양측 모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며 날을 세우고 있다.

최근엔 한국은행까지 가세해 은행과 증권이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그동안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자제해 왔지만, 지난 10일 "증권사의 지급결제 허용은 `결제리스크`가 있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증권사와 은행간 대립은 국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인 정의화 의원과 간사인 엄호성 의원이 자통법을 지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종구 의원과 박영선 의원은 증권사의 지급결제 허용을 이유로 반대의사를 분명히했다. 이에 따라 자통법이 올해 국회를 통과할지조차 불투명하다. 만약 올해 자통법이 통과되지 못하면 대선 정국과 맞물려 자칫 법안 자체가 폐기될 수도 있다.



자통법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 대상은 `증권사의 지급결제 허용`이다.

재정경제부가 제안한 법률안에 따르면 고객이 증권계좌에 입금한 예탁금을 자유롭게 이체할 수 있게 된다.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찾는 것은 물론 신용카드 결제, 계좌이체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은행이 전담해 오던 지급결제 업무 상당 부분을 증권사가 가져가는 셈이다.

▲ 자통법 지급결제를 두고 은행·증권사간 논쟁이 뜨겁다. 사진은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자통법 토론회.

은행권이 증권사 지급결제 허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결제시스템의 안정성`이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면 국내 금융기관간 결제시스템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주가 급락으로 고객예탁금이 일시에 빠져 나가게 되면 특정 증권사가 제때 결제를 하지 못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한 증권사 부실이 연쇄적으로 다른 금융기관으로 확산돼 결제시스템 자체가 망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은행권은 또 증권사의 예탁금을 한국증권금융이 통합해 관리하고 있는 것도 위험요소로 보고 있다. 증권금융에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증권사를 통한 지급결제 전체가 마비된다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그러나 이같은 은행권의 지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은행권이 지적하는 결제리스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주식시장이 폭락한다고 예탁금이 일시에 급격히 빠져 나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와 2001년 미국 9·11 테러 직후 고객예탁금을 오히려 증가한 것을 예로 들며 "은행권의 우려가 지나치다"고 반박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또 "규모가 작은 신용협동조합과 상호저축은행도 별탈없이 하고 있는 지급결제를 증권사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지급결제가 소비자들의 편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허용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종록 증권업협회 상무는 "증권사 자금이체 허용은 금융소비자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은행권이 증권사 자금이체 업무를 반대하는 것은 금융소비자보다 자신들의 수익감소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은행의 지난해 상반기 수익 8조원중 7조원 정도가 이자수익으로 추정된다"며 "증권사에 이체가 허용되면 이중 20% 가량이 증권사 계좌로 옮겨와 은행권의 이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지급결제 허용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과 증권사의 싸움 이면엔 사실 `종합자산관리계좌(CMA)`가 자리잡고 있다. CMA는 증권사들이 내놓은 금융상품으로 고객이 예치한 자금을 양도성예금증서(CD)와 국공채에 투자한다. 금리가 3~4% 수준으로 은행예금보다 훨씬 높아 최근 직장인들의 급여통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은행권에선 증권사에 지급결제가 허용되면 CMA가 사실상 예금통장 역할을 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은행 고객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급여통장이 대거 증권사 CMA로 몰려갈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CMA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은행권이 더욱 긴장하고 있다.
 
한국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100만개였던 CMA계좌는 지난 2월 189만개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금융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증권사에 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하면 2005년말을 기준으로 100조원에 달하는 은행예금 중 약 20%인 20조원이 CMA를 비롯한 증권사 계좌로 이동할 것으로 분석했다.

은행권에선 증권사 지급결제 허용이 은행들의 고유 업무인 예금을 침해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행 법률상 은행, 보험, 증권이 구분돼 있어 증권사에 지급결제를 허용하면 이같은 벽이 허물어 진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은행과 증권 진영은 증권계좌가 예금인지 아닌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은행측은 고객이 예탁한 돈을 자유롭게 출금하고 이체할 수 있는 만큼 `사실상 예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창 한국은행 금융결제국 차장은 "은행, 보험, 증권 분업 구조하에서 증권사에 지급결제를 허용하는 것은 증권사에 아무런 제재없이 은행 업무를 할 수 있게 문을 열어 주는 셈"이라며 "증권사가 이를 통해 수신기관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증권사측은 그러나 "증권계좌는 예금이 아니다"고 맞서고 있다. 은행은 고객 예금을 개인과 기업에 대출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지만, 증권계좌 고객예탁금은 증권사가 손 댈 수 없어 운용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임종록 상무는 "고객 예탁금은 전액 현금으로 보유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지급준비율이 100%"라며 "증권계좌를 예금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은행권이 증권계좌가 사실상 예금 성격을 띄게 되면 증권사들도 지급준비금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논리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은행처럼 고객 자금을 운용하지 않고 현금으로 갖고 있어 지급준비금을 쌓을 이유조차 없다"는 것이다.



증권업계와 은행업계는 자통법이 한국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필요다는데는 동의하고 있다. 자통법이 한국 금융시장 선진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총론`엔 공감하지만, 증권사와 은행의 수익과 직결된 지급결제라는 `각론`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증권업계와 재정경제부는 "한국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 자통법 도입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증권사 지급결제라는 나무에 막혀 숲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 자본시장이 규제에 발목이 잡혀 선진국에 비해 뒤처진데다, 자본시장이 실물경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자통법이 시행되야 한다는 것이다.

한미FTA 체결도 자통법 통과를 서둘러야 할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앞으로 해외 선진금융기관이 밀려 들어올 때를 대비해 국내 금융기관들의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자통법 도입이 필요한 만큼 일단 올해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고, 향후 지급결제를 비롯한 문제들을 풀어갈 것을 조언하고 있다.

김건식 서울대 교수는 최근 부산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자통법의 금융투자회사의 겸영과 증권사 지급결제에 대한 지적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물론 문제가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것에 매몰돼 자통법 도입 자체가 지연되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법을 도입한 후 보완해 나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성렬 동아대 교수는 "자통법은 경쟁에서 뒤처진 한국 자본시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라며 "금융 선진국가로 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했다.

조 교수는 "미국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골드만삭스 같은 금융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첨단 기술을 지원할 수 있는 튼튼한 자본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국내 우수 기업을 지원할 수단은 자본시장 뿐"이라며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로 가기 위해 자통법이 하루 빨리 제정되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