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업계 M&A 바람 "우리도 구치·프라다처럼"
by한국일보 기자
2007.01.12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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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업계 M&A는 기업의 포트폴리오 전략을 추정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성복이 강한 ㈜세정이 여성복 부문 강화 차원에서 국내영업권 매입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진 블루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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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제공] 새해 벽두 코오롱이 캠브리지를 인수했다는 소식에 패션계가 크게 술렁였다. 이번 인수로 남성복 부문 3,4위였던 코오롱패션과 캠브리지가 합쳐지면서 남성복 시장이 부동의 1,2위인 제일모직 LG패션과 함께 3강체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두 회사의 연매출 규모를 합치면 3,400억원대(2006년 추정)에 이른다.
당장 제일모직과 LG쪽에서 의외의 빅딜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양 사의 물밑 합병움직임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워낙 빅 2의 아성이 견고해 파괴력은 크지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 성사가능성은 낮다는 시각이 많았다.
패션관계자들은 이번 빅딜이 지난해 유통업쪽에서 활발했던 M&A가 패션업계도 본격적으로 점화되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고있다.
지난해에는 이랜드가 데코와 네티션닷컴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패션유통부문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어 제일모직이 한때 수입의류업체 개미플러스가 갖고 있던 미국 여성 캐릭터 브랜드 ‘띠오리’의 국내 영업권을 본사로부터 직접 사들였다.
‘타임’과 ‘시스템’ 등 유명 브랜드를 거느린 패션기업 한섬이 M&A시장에 나온다는 소문은 업계에서는 구문에 속한다. 또 남성복 ‘인디언’과 중가 여성복 ‘올리비아 로렌’을 내놓고 있는 ㈜세정이 취약한 여성복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안나 몰리나리’와 ‘블루마린’ 을 인수하기 위해 이 두 브랜드의 국내 영업권을 가진 태창과 조율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린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거의 80~90% 이상 양측의 입장이 좁혀진 상태다.
빅딜을 성사시킨 코오롱은 한 술 더 뜬다. 캠브리지 인수작업에 참가한 한 간부는 “패션전문기업으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확고한 브랜드 파워를 보유한 매물이 나오면 적극적인 M&A를 시도할 것”이라며 “국내외 몇몇 여성복 브랜드를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LG패션의 오규식 부사장도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신규 브랜드 런칭 보다는)좋은 브랜드를 사들이는 쪽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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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는 막강한 자본력과 유통망을 앞세운 패션업계의 인수합병(M&A)이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세분화하는 패션시장을 적절히 공략하기 위해 위험부담이 큰 신규 브랜드 출시보다 이미 시장진입에 성공한 브랜드를 사들이는 쪽이 선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새해 벽두 패션계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코오롱에 인수합병된 ㈜캠브리지의 남성신사복 캠브리지멤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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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업계가 M&A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신규브랜드를 띄우는 것 보다 이미 인지도를 확보한 브랜드를 사서 잘 키우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에서 나온다.
패션업계 전문지 ‘패션인사이트’ 유재부 부장은 “여성복 신규브랜드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초기비용만 대략 200억원이 소요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공여부를 가늠할 수 없는 브랜드를 새로 만드는 것 보다 이미 시장진입에 성공한 브랜드를 사는 것이 위험부담을 더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20세기 후반 '대기업 시스템은 패션의 창의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비판아래 소규모 패밀리 비즈니스를 주창하던 국내 패션계가 21세기에 들어서자 마자 다시 대기업 체제로 돌아설 수 있음을 시사한다.
패션업계의 M&A는 세계적인 추세다. 유럽 럭셔리 업계만 봐도 2000년대 들어 LVMH와 구치그룹, 프라다그룹 등 삼강구도로 빠르게 재편된 것은 막강한 자본을 내세운 M&A의 힘이 컸다.
LVMH가 루이비통 크리스찬디올 지방시 펜디 셀린드 겔랑 등 최고급 브랜드 60개를 갖고있으며, 구치그룹은 구치 이브생로랑 세르지오롯시 알렉산더맥퀸 스텔라맥카트니 발렌시아가 등의 라벨을 갖고있다. 프라다그룹은 프라다를 비롯 미우미우 아제딘알라이야 카슈를 보유하고 있다.
그룹에 속한다는 것은 자본력이 딸리는 소규모 패션디자이너나 브랜드 입장에서는 막강한 경영지원 및 관리를 받으며 고수익을 창출하는 인기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질 수 있다. 지난해 이랜드에 합병된 네티션닷컴의 경우 급변하는 패션유통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이랜드 같은 자본력을 갖춘 거대유통망에 얹히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대기업의 우산 아래 드는 것은 패션기업의 창의성을 죽여 브랜드를 망가뜨릴 위험도 상존한다. 대표적인 예가 90년대 고급스러운 미니멀리즘의 대명사였던 ‘질샌더’의 경우다. 프라다그룹에 합병됐으나 의견차이로 결별했다가, 재결합하고 다시 최종결별을 거치는 과정에서 질샌더의 브랜드 가치와 인지도는 크게 훼손될 수 밖에 없었다. 이랜드가 합병한 데코의 경우도 애초의 클래식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 대신 아울렛용 브랜드로 전락하면서 패션중심 도시에서는 무색무취한 브랜드로 외면받는다. 수익창출을 중시하는 대기업 경영마인드가 감성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패션기업과 충돌하면서 빚어진 일들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M&A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긍정적인 측면은 제대로 브랜드 관리가 될 경우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생산 부문의 해외소싱이 일반화하면서 다양한 브랜드들이 같은 우산 아래 올망졸망 모여있으면 다품종 소량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생산단가도 낮출 수 있다. 반면 경영 마인드가 지나치게 앞설 경우 장기적으로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수익이 나지 않는 브랜드는 가차없이 퇴출되기 때문. 또 M&A가 국내외를 가리지않고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우리 고유브랜드가 설 자리는 점점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세계적인 패션칼럼니스트인 수지 맨키스는 인터내셔널 헤롤드 트리뷴에 쓴 글(2006년 10월 2일자)에서 “세계 패션계가 거대 패션유통그룹으로 재편되면서 디자이너의 시대는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한국의 중소 패션업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