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풍선 대사가 달라졌다 만화책 편견을 깼다
by오현주 기자
2013.04.08 09:58:22
이원복 교수 '먼나라 이웃나라' 완간
32년 세계여행 대장정 '에스파냐'서 마무리
1700만부 판매·2000쇄 발행
싸구려 콘텐츠·영웅소재 탈피
만화로 공부 '학습만화' 새장
저작권 아닌 '상품' 자체로 수출
| ‘먼나라 이웃나라’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그림=김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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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을 기억하는가. 배낭을 꾸려 유럽으로 떠난 두 소년의 여행기. 1975년부터 6년간 인기리에 연재되던 이 만화는 1981년 ‘먼나라 이웃나라’로 갈아탔다. 그후 유럽 6개국, 일본과 우리나라, 미국과 중국을 거친 ‘먼나라 이웃나라’가 에스파냐에 이르러 세계여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첫 연재를 시작한지 32년,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부터 따지자면 38년 만이다.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가 펴내온 ‘먼나라 이웃나라’는 한국만화출판에서 도전의 역사다. 세계사를 만화란 도구에 실어 펼쳐낸 것도 처음이고 연재만화가 단행본으로 묶여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것도 처음이다. 1981년 첫 연재를 시작한 지 6년 뒤인 1987년, ‘먼나라 이웃나라’는 지금 고려원북스의 전신인 고려원에서 네덜란드·프랑스·도이칠란트·영국·스위스·이탈리아 등 유럽 6개국 편으로 출간됐다. 이후 10여년의 공백을 거쳐 김영사로 넘어간 뒤에는 2000년 일본 2권, 2002년 우리나라, 2004~2005년 미국 3권, 2010~2011년에 중국 2권을 추가했다. 그리고 올해 에스파냐 편을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완간을 선언한다. 대장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이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가 추구한 화두는 글로벌화와 오픈마인드”라며 “시작 당시 유럽은 우리에게 부러운 나라였지만 이젠 그 관계가 수정돼야 할 때”라고 완간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간 ‘먼나라 이웃나라’는 누적판매 1700만부, 누적발행 2000쇄를 훌쩍 넘겼다. 완간은 했지만 끝이 아니다. 여전히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출간 20여일 남짓 ‘에스파냐’ 편은 순식간에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양의 규모만이 아니다. 질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발간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사이 변모해온 한국만화출판의 위상이 보인다.
▲만화는 책이 아니다?
‘편견은 깨졌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힘은 무엇보다 만화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싸구려가 아닌 고급화된 콘텐츠, 재미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다는 교양·학습만화의 새장을 열었다. 초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나출판사)와 ‘마법천자문’(아울북), ‘와이’(예림당)의 토대가 된 것은 물론이다. 그만큼 시간과 공을 들였다. 이 교수는 만화만을 위한 현지답사를 수년씩 지속했고 역사관에선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문화에는 겸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지론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한국의 만화출판이 주로 일본만화를 번역해내기에 급급하지 않았느냐”며 “이 교수의 지난한 작업 이전까지 한국만화시장의 형성은 없었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영웅은 필요없다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역사도 만화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또 다른 의의는 소재를 무한히 확장한 것이다. 지난 30여년 한국만화출판의 큰 변화는 다루는 폭이 넓어지고 독자대상이 확대된 것이다. 만화는 더 이상 아이들만 흥분시키는 영웅 만들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음식을 스토리라인 중심으로 끌어낸 허영만의 ‘식객’(김영사), 일상만화의 성공시대를 열어준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재미주의), 현대인의 직장생활에 사실적으로 접근한 윤태호의 ‘미생’(위즈덤하우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콘텐츠 아닌 상품으로 수출
‘상품을 판다.’ 출판에서 수출이라고 할 때는 저작권 판매를 의미한다. 그런데 ‘먼나라 이웃나라’의 경우는 다르다. 번역출판권을 파는 계약이 아닌 완성품으로 수출계약을 맺는 사례를 만들어낸 것. 시리즈 중 다소 의외였던 ‘우리나라’ 편은 영어판 동시출간으로 도서부문 한류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외국어 번역출간 프로젝트는 현재 일어·독어·불어 등으로 진행 중이다. 김문식 김영사 편집부 책임팀장은 “도서완성품 수출형태는 출판계에선 드문 케이스”라며 “현지와 직접 소통해 수출통로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성공적 완간에 대해 한 소장은 “압축적인 글 속에 각 나라에 대한 저자 특유의 관점을 명징하게 드러냈다”며 “디자인 요소가 가미된 도판 등 당시로선 드물게 자체완결성을 이룬 덕에 책도 팔리고 정신까지 고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시적 수요에만 휘둘렸다면 이토록 길게 오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