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돋보기]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vs ‘박근혜는 생각하지마’
by김성곤 기자
2016.02.20 10:12:05
|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국정에 관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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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세계적인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왜 그럴까요? 말장난 같지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코끼리’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도대체 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을까?”라는 궁금증이라도 생기면 코끼리를 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4.13 총선이 불과 5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야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핵심은 ‘프레임 전쟁’입니다. 정치가 말과 글로 이뤄지다보니 어떤 프레임이냐가 승패를 가릅니다. 그렇다면 ‘코끼리’를 ‘박근혜 대통령’으로 바꿔볼까요?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박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마찬가지 이유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정한 프레임을 부정하면 할수록 그 프레임은 더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 대기업 대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할까?’오마바케어와 저렴한 건강보험법 중 어느 게 더 좋으십니까? 미국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 제작진이 시민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바마케어는 싫지만 저렴한 건강보험법은 좋다는 의견이 압도적 다수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두 개가 같은 법안이라는 점입니다. 미국 보수세력들이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안에 ‘오마바케어’라는 꼬리표를 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정치의 99%는 말과 글입니다. 선거 역시 말과 글 다시 말해 언어가 핵심입니다. 특정 정치세력이 선거에 이기기 위해 ‘어떤 생각의 틀’ 다시 말해 프레임을 사용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군정종식 △정권교체 △지역주의 타파 △3김정치 청산 등 역대 선거를 휩쓸었던 프레임 중에는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는 언어학을 현실정치에 접목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미국 민주당의 대선패배 원인은 분석한 글입니다. 특히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제목은 공화당의 상징 ‘코끼리’를 비꼬면서 보수진영이 장악한 프레임의 헤게모니를 전복시킬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2006년 한국어판 서문을 잠깐 살펴볼까요?
“왜 서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에 투표할까? 서민들이 보수 정당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사실’을 알고 이해하기만 하면 돌아설 것이라고 진보 진영은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혹은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체계와 그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언어와 ‘프레임’에 근거하여 정치와 후보자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는 반대로 투표하는 것이다. 그들을 투표소로 들어가게 하는 동기는 바로 그들의 가치 -보수주의자의 경우에는 엄격한 권위주의적 가치-이다. 프레임, 곧 생각의 틀을 바꿔라.”
◇‘세금폭탄·잃어버린 10년’ 새누리당의 주옥같은 프레임 전략‘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미국도 미국이지만 한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정치 또는 언론종사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합니다. 300명에 이르는 여야 국회의원 중 나름 ‘전략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거나 선거 프레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거의 다 읽어봤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더 절실한 쪽은 아무래도 야권이었습니다.
시계를 참여정부 때로 돌려볼까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17대 총선 패배 이후 각종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합니다. ‘세금폭탄’ ‘잃어버린 10년’ 등 주옥과도 같은 프레임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현 야권의 전신인 당시 열린우리당은 새로운 프레임으로 정국을 반전시키기보다는 상대의 프레임에 말려들어 오히려 그들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부동산규제책이었던 종합부동산세를 ‘세금폭탄’이라고 규정한 것은 프레임의 위력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떻게 방어해도 여론은 뒤집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종부세 과세 대상은 인구의 2%에 불과했지만 반대여론은 30%를 넘었을까요. ‘잃어버린 1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초고속 정보통신사회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아무리 강조해봤자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프레임 앞에서는 맥을 못췄습니다.
야권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보였던 2012년 대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의 확장성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왔습니다. 반면 야권은 문재인·안철수 ‘야권단일화’ 프레임을 내놓았습니다. 그마저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아울러 단일화 프레임은 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대박을 쳤을 뿐 사실 수명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박근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현 야권이 프레임 전쟁에서 이긴 적은 없을까요? 굳이 찾자면 몇 가지 사례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4년 17대 총선 직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세력 심판론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또 2010년 지방선거 직전 천안함 폭침과 5.24 조치로 불거진 북풍의 위력 앞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는 프레임을 내세워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무상급식’ 프레임 역시 승리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아울러 과거 민주노동당 대선후보였던 권영길의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도 성공한 축에 드는 프레임인 듯합니다.
◇‘박근혜는 생각하지마’ 野 어떤 프레임을 내세워야 할까?여야 총선공천이 본격화하면서 총선 열기도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프레임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여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16일 국회 연설이 대표적입니다. 경제와 안보위기가 코앞이데 국회는 도대체 뭐하냐는 것입니다. 여론도 3명 중 2명의 국민의 박 대통령의 연설에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대통령에 비판적인 호남지역(55.7% vs 43.7%)은 물론 20대(공감 61.1% vs 비공감 36.1%)에서도 공감 의견이 높았습니다.
반면 야권 처지는 옹색합니다. 고장난 레코드처럼 낡은 프레임을 들고 나왔습니다. 총선 승리의 희망이 아니라 새누리당 과반저지, 개헌 저지선 확보, 호남 경쟁·수도권 연대라는 패배주의적 프레임만이 난무합니다. 2006년 지방선거 직전 ‘싹쓸이만은 막아달라’는 이상한 프레임을 보는 듯합니다. 총선은 보통 심판론이 작동하기 마련인데 정권심판론보다는 무능국회 심판론이 더 우세해 보일 정도입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개성공단 전면중단이라는 메가톤급 이슈가 터졌습니다. 여야의 대처법은 판이합니다. 햇볕정책을 대북퍼주기라고 비판해왔던 새누리당은 “우리가 지원한 빵이 핵과 미사일로 돌아왔다”고 주장합니다. 내친김에 북한인권법, 테러방지법 처리 등을 야당에 촉구합니다. 여권 일각에서는 제한적 수준의 핵무장론까지 나올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습니다. 반면 야권은 어떨까요. 야권은 햇볕정책 유지론·한계론·실패론·보완론·수정론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중구난방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의 창시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계승한다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도 통일된 의견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레임 전쟁에서 판판히 깨진 야권에 제안해 봅니다. 4.13 총선 프레임으로 ‘헬조선 탈출’은 어떨까요. 그러나 야권의 부족한 상상력은 ‘거대 여당 견제론’을 들고 나올 것 같습니다. 패배를 기정사실화한 프레임으로는 총선 승리는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