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정씨 일가는 책임 다했나

by안근모 기자
2000.08.14 13:00:21

현대가 13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자동차 지분을 매각, 현대건설에 유동성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자구계획을 발표했다. 이처럼 오너의 재산이 오가는 자구안을 놓고 그룹 주변에서는 `사재출연`이란 주장을 내놓기도 하지만 세간의 시각은 그리 곱지 않다. 단지 `포트폴리오`만 변경됐을 뿐 오너로서 어떠한 금전적 부담도 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 전 명예회장 외에 다른 정씨 형제들은 `포트폴리오 변경`조차 없었다. 정씨 일가의 이같은 현대해법은 지난해 이건희 회장이나 김우중 회장이 삼성자동차 및 대우사태 당시 내놓은 해법들과 비교할 때 균형을 크게 잃은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김우중 대우회장의 경우 = 김우중 대우회장은 그룹 워크아웃 결정 직전인 지난해 7월 채권단 앞으로 모두 1조3500억원에 달하는 개인재산(私財)을 내 놓았다. 형식은 4조원 규모의 신규 단기자금 차입에 따른 담보였지만, `임의처분 동의각서`를 함께 제출해 사실상 채권단이 그룹 빚을 갚는 데 알아서 쓰라고 내 준 셈이다. 그룹 역시 8조8800억원 규모의 자산을 같은 형식으로 채권단에 제출했다. 김우중 회장이 내놓은 자산이 1조3500억원 가치가 있느냐는 논란도 있으나,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공식적인 재산` 모두를 그룹과 채권단에 헌납해 부실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건희 삼성회장의 경우 = 김우중 회장에 조금 앞서 이건희 삼성회장은 삼성자동차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삼성생명 지분 21.4%를 채권단에 내놓았다. 협력업체의 손실분을 포함한 총 4조9000억원의 삼성자동차 부채 가운데 2조2000억원을 개인재산으로 갚겠다는 의미였다. 역시 삼성이 평가한 삼성생명 주식 가치가 적정하냐는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삼성그룹의 금융지주회사로 통하는 삼성생명에서 이 회장이 차지하는 지분은 4.6%만이 남게 됐다. `결자해지` 차원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게 당시의 평가였다. ◇정씨 일가의 경우 = 수개월 동안 한국경제를 짓눌러 왔던 현대그룹의 오너일가 가운데 개인재산을 움직인 사람은 정주영 전 명예회장 한 사람이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자신의 현대차 지분 6.1%(2200억원)를 채권단에 매각한 뒤 이 돈으로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사용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정 전 명예회장의 재산목록에서 `현대차 주식`이 `현대건설 회사채`로 변경된 것일 뿐 재산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반면 채권단은 우선 현대차 지분을 재매각할 때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져야한다. 또한 현대에 대한 채권을 계속 연장해 줌으로써 유동성 제한과 함께 여신 리스크를 동시에 부담해야 한다. 채권단이 이같은 부담의 대가로 얻은 것은 채권회수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 하나뿐이다. 재벌 총수 그룹의 좌장격인 정주영씨가 `3부자 동반퇴진`이란 카드를 내밀며 김우중, 이건희씨와는 비교가 안될 사업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