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장군, 바위 덩어리로 공기놀이 했다는데…
by조선일보 기자
2009.01.08 11:45:00
[조선일보 제공] 월악산 입구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서 경북 문경으로 넘어가는 하늘재는 소달구지 끄는 서민들의 길이었다. 이 고개 아래 위치한 미륵사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 즉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그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바위산 속 세워진 석불입상, 오층석탑, 석등 등이 남아 있는 미륵사지에 가면 기이하게 생긴 둥그런 바위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온다. 천연 바위 위에 누군가 둥글게 깎아 올린 지름 1m 정도의 돌덩이는 온달장군이 갖고 놀던 공깃돌이란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때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월악산에 주둔하던 온달장군이 '바위 공깃돌'로 힘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천소영 저 '전설따라 지명따라 한국의 전설기행'
| ▲ 바위 많은 월악산에 위치한 미륵사지에 서있는‘미륵사석불입상’은‘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조선영상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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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추워요. 난 그냥 여기 있을래요."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말 좀 들어라. 같이 가서 소원 빌고 내려오자." 꽤 두꺼운 트레킹화를 신었는데도 발이 시린 1월 초 오전 9시, 쌀쌀한 산바람을 뚫고 부지런한 부자(父子)가 미륵사지를 찾았다. 아들이 잘 되길 바라는 아빠의 맨손이 아들의 장갑 낀 손을 잡아 끈다.
지붕도 없이 바위 산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높이 13m의 '미륵사석불입상' 앞에선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미륵존불(彌勒尊佛), 미륵존불…'을 읊고 있었다. 아침 일찍 손을 호호 불어가며 촛불을 들고 석불 앞으로 향하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새해의 소망이 묻어나는 듯하다. '온달장군의 공깃돌'은 석불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다. 힘껏 손으로 밀어봐도 꿈쩍하지 않는 거대한 돌을 공깃돌 삼아 놀았다니, 그야말로 '전설 같은 얘기'다. '우연히 네모 바위 위에 동그란 바위가 올라간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은 금물. 온달장군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동그란 바위 위엔 가느다란 홈을 정성스레 파서 물을 아래로 흐르게 했다.
| ▲ 온달장군이 힘 자랑하려고 가지고 놀았다는"온달 공 깃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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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불상의 거대한 원통형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엉성한 옷 주름 등이 '전형적인 고려 초기 충청도 불상'이라고 말한다. 남쪽을 향하는 여느 불상과 달리 북쪽을 보고 서있는 게 특징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북쪽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염원을 가득 머금은 '설계'다.
미륵사지에서 차로 5분 정도만 가면 제천에 다다른다. 경계를 넘으면 바로 덕주공주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는 '덕주산성'이 나온다. 빈틈 없이 맞물린 현대의 벽돌보다 돌 사이사이 빈틈이 많아 운치 있어 보인다. 산성 위에 누군가 쌓은, 한 뼘 크기의 작은 돌탑에서 따뜻한 기운이 전해진다. 등산화를 갖췄다면 찬 바람에 굳은 몸도 풀 겸 가파른 산성을 계단 삼아 산 위로 조금 올라가봐도 좋겠다. 기암과 계곡, 절벽 위 노송(老松)이 어우러진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멋진 진경산수화 한 폭 그릴 수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빌고 싶어진다.
월악산을 빠져 나오자마자 충주호에 닿는다. 마의태자가 충주시 노은면에 있는 국사봉에 올라 남겼다는 예언이 머리를 스친다. "이 국사봉이 물에 비치고 저 아래 뱃재에 배가 오갈 때가 바로 나라를 구하는 시기가 되리라." 쇠락해가는 한 나라의 왕자가 나라를 생각하며 남긴 마음이 거대한 인공호에 잔잔히 비치며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영동고속도로 이천·장호원 나들목→충주→수안보→월악산국립공원→월악산 송계계곡 삼거리→미륵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