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항재·두위봉·화절령…강원도 태백의 야생화 나무기행
by조선일보 기자
2008.09.18 10:47:28
송혜진 기자의 나무기행
강원도 태백 高山花園(고산화원)
秋風落葉<추풍낙엽> 秋風開花<추풍개화>
[조선일보 제공]
강원도 정선 일대에 있는 고산화원(高山花園)에선 놀랄 일투성이다. 독특하고 신기하게 생긴 온갖 야생화들이 숲 곳곳에서 몸을 낮추고 우리를 당황시킬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야생화 군락지가 있는 해발 1330m의 함백산 만항재, 해발 1465m의 두위봉(일명 두리봉), 강원도 정선 '화절령(花折嶺)' 일대에선 지금 가을 풀꽃이 절정. 이 곳에서 오리떼를 연상시키는가 하면, 복면을 쓴 자객처럼 보이는 꽃, 새순을 따서 나물로 먹기 좋다는 착한 야생화까지…, 각양각색의 가을 야생화들을 만나고 왔다. 야생화 풀밭 너머 병풍처럼 펼쳐진 높은 산등성이 그림자, 새파랗게 쏟아지는 가을 하늘은 '덤'. 10월초까지 끊임없이 피고 진다는 가을 야생화…, 그래도 꽃구경 가는 발걸음은 재촉하는 게 낫다. 2008년 9월의 눈부신 가을만큼은 지금이 마지막이니까.
| ▲ 개쑥부쟁이 꽃 무더기가 연보랏빛으로 폭발했다. 구름은 가을 하늘 아래 파도처럼 일렁인다. 강원도 정선 고한읍 함 백산 만항재, ?산상의 화 원3이라는 별명답게 70 여종의 야생화가 앞다투 어 피는 곳이다./조선영상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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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 고한읍 함백산 등산길은 '게으른 산행자'를 위한 최적의 코스. 우리나라에서 포장도로가 놓인 고개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점이 바로 '만항재'다. 굳이 땀 흘려 등산할 필요 없이, 자동차를 끌고 올라갈 수 있다. 넓은 야생화 밭과 산책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가을 등산객을 기다린다. 자주꽃방망이·오리방풀·둥근이질풀·흰투구꽃 등 야생화만 70여 종. 그 중에서도 개쑥부쟁이 같은 연보랏빛 들국화는 지금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본디 꽃은 길가, 낮은 땅의 풀숲에서 흔히 핀다. 햇빛이 넘치는 자리가 아니면 쉽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빽빽하고 울창한 숲일수록 꽃을 보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힘센 나무들이 앞다퉈 짙은 그늘을 만드는 곳에서 약한 꽃은 금세 도태되고 만다.
고산화원(高山花園)의 꽃들이 특별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성한 나무에도 기죽지 않는 악착같은 풀꽃들만 한 데 모여있다. 예쁜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체력까지 좋은 꽃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개쑥부쟁이는 이 중에서도 최고의 '건강 미녀' 야생화다. 우리나라 산과 들이라면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잘 자란다. 나무가 많은 울창한 숲, 고산지대에서도 개쑥부쟁이는 기가 죽는 법이 없다. 강원도 산간 도로 어디서든 빼곡하게 앞다투어 핀다.
가뭄에도 유독 강하다. 날이 가물고 건조해지면 개쑥부쟁이는 땡볕을 피해 줄기를 옆으로 퍼뜨려 자란다. 가을 내내 소담한 연보랏빛 꽃송이를 자랑할 수 있는 비결이다.
어느 모로 보나 잘난 꽃이 틀림없는데, 이름은 왜 그 모양일까. 쑥부쟁이 꽃 종류 중에서도 너무 흔해서 '개쑥부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꽃 입장에선 억울할 법도 하다.
이 녀석과 닮은 꽃으로는 쑥부쟁이와 까실쑥부쟁이, 나물로도 먹는다는 개미취가 있다. 하나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무기로 가을 숲을 점령해버린 '연보랏빛 미녀 군단'이다.
'새색시'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 화사한 야생화. 과연 이름처럼 둥글고 아담한 분홍빛 꽃잎이 한복을 입고 시집 온 색시의 어깨를 연상시킨다.
참하게 생겼지만 역시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일단 체력 하나는 둘째 가라면 서럽다. 지리산·태백산 같은 높은 숲과 초원에서 무리지어 자라는 강한 고산지대 야생화. 쓰임새도 똑똑하다. '이질(痢疾)'에 약으로 쓰는 풀이라는 뜻으로 '둥근이질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야말로 어른들이 데려다가 며느리 삼고 싶어하는 성격을 지닌 꽃인 셈이다.
투구꽃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가을 야생화. 이름처럼 투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투구꽃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진한 보랏빛의 투구 혹은 복면을 뒤집어 쓴 자객의 얼굴처럼 보인다. 강한 독이 든 뿌리는 '초오(草烏)'라는 이름의 극약으로도 쓰였다고. 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보통 아닌 꽃. 흰 투구꽃도 곳곳에 피어 있었다.
낮게 피어 숨죽이고 있는 투구꽃을 모른 척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째 등골까지 서늘한 기분…. 한데 가을 숲엔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땀 흘려 걷는 즐거움에 푹 빠진 사람이라면 함백산의 '만항재'보다는 '두위봉'이나 '화절령'에서 트레킹을 하면서 꽃구경을 하는 게 좋겠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고 출발하자. 꽃이나 사람이나 끈질겨야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법이니까.
산행에 서툰 사람이라면 해발 1465m의 두위봉(일명 두리봉)을 올라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거친 돌과 자갈을 헤치고 올라가는 산길, 때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위봉은 산행의 즐거움을 경험하기엔 최적의 장소. 국내 최고령 나무로 알려진 1400살의 주목(朱木)도 이곳에 있다.
| ▲ 오리 떼 가 조롱조롱 모여있는 것 같다. 흰진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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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은 두위봉에서 시작됐다.
주목 군락지까지 올라가는 가파른 산길,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나무해설도감'과 '가을꽃 쉽게 찾기'를 쓴 나무연구가 윤주복씨가 "조금만 가시면 재미있는 오리 떼를 보실 수 있다"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엥, 오리 떼라고? 농담이라고만 생각했다.
10분 정도 더 걸어갔을까, 범상치 않게 생긴 흰 꽃 무더기가 보였다. "앗! 아까 저 꽃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죠?" "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죠?"흰 오리들이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 같은 야생화. 바로 '흰 진범'이다. 좀 더 걸어가니 이번엔 보랏빛 오리 떼를 닮은 꽃, '진범'도 한 가득 보였다. 이 초현실적인 생김새라니…!
| ▲ 우주선처럼 날개를 달고 있는 나래회나무 열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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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한 번 기가 막히게 생겼다. 비즈 장식이 달린 붉은 등 같기도 하고, 새빨간 우주선 같기도 하다. 화려한 열매의 주인공은 나래회나무.
열매는 자세히 보면 십자모양으로 생긴 네 장의 날개 아래에 동그란 씨앗이 다닥다닥 달린 모양이다. 대표적인 겉씨식물이다. 본래 마치 딱지를 볼록하게 접은 것처럼 맞붙어 있던 날개가 가을이 되면 이렇게 쫙 벌어져 우주선 형태로 변신한다.
산행에 지쳐있을 무렵, 윤주복씨가 "선물"이라며 복주머니처럼 생긴 초록빛 열매를 내밀었다. 주름이 잡힌 겉 껍질을 파삭 소리가 나게 뜯자, 도토리 같은 단단한 열매가 나온다. "먹을 수 있다"는 설명에 이로 콱 깨물었다. 쪼개진 열매 속 하얀 속살이 오독오독 고소하게 씹힌다.
개암나무를 두고 전북에선 '깨금', 경상도에선 '깨암'이라고 불렀다고. 모두 고소한 맛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옛날엔 개암 기름을 짜서 식용유로도 썼다.
옷에 뭐가 자꾸 달라 붙는다. 초록색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작은 열매가 다닥다닥 옷 위에 붙어 있다. "아, 그건 멸가치라는 야생화의 열매예요. 대표적인 숲 속 식물인데, 열매 끝에서 끈끈한 액체가 나와서 사람이나 짐승 몸에 달라 붙죠." 이 녀석은 이렇게 다른 동물을 '스토킹' 하는 방식을 통해 숲 여기저기로 퍼져나가서 번식한다고. 꽃은 아주 작다. 눈곱처럼 작은 하얀 꽃잎이 동글동글 모여 있는 모양이다.
이름 한 번 예쁘게 지었다. 정선 고한과 영월 상동을 잇는 '운탄길'(석탄 운반길)에 있는 해발 960m 고개 '화절령(花折嶺)'은 '꽃을 꺾는 고개'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花)'는 다름 아닌 진달래. 산골 아낙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지천으로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뜯어 화전을 부쳐먹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진달래꽃을 보긴 힘들다. 세월이 흐르고 고갯길 숲이 울창해지면서 진달래보다 튼튼하고 질긴 야생화들만 살아남았다.
화절령엔 새순을 나물로 먹는 야생화 종류가 많다. 쇠서나물, 왕고들빼기, 참취…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쇠서나물은 깔깔하고 거친 털이 잔뜩 달린 잎이 특징. 소의 혀처럼 깔깔하다고 해서 '소의혀나물'이라고 부르던 것이 '쇠서나물'로 굳어졌단다. 민들레를 닮은 조밥나물과 흰 꽃잎의 왕고들빼기는 모두 줄기를 자르면 나오는 흰색 즙액이 특징. 역시 어린 새순을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
고려엉겅퀴는 보랏빛 꽃이 예쁜 야생화. 한데 우리에겐 '곤드레나물'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전국에 분포하는 야생화, 어린 잎을 나물로 먹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곤드레밥'이 바로 이 꽃의 잎으로 만든 것이라고.
뾰족뾰족한 꽃잎을 온 몸에 달고 있는 모양이 영 탐탁지 않다.
꽃이라기엔 애매한 생김새, 그러나 '수리취'는 누가 뭐래도 버젓한 가을야생화다. 희고 도톰한 솜털이 달린 잎이 특징, 옛날 사람들은 이 잎을 잘 말려서 부싯돌과 비벼서 불을 내는 '부싯깃'으로 썼다고.
각시취도 곳곳에 피어있다. 동그랗고 복실복실한 자줏빛 솜방망이처럼 생겼다. 그 위로 가는 꽃잎이 터질듯 피어난다.
숲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 중에서도 유난히 이름을 헷갈리기 쉬운 꽃이다.
궁궁이풀하고 몹시 닮았지만 이 녀석의 이름은 '어수리'. 오밀조밀 달린 꽃 끝에 조금 더 큰 꽃잎이 레이스처럼 한번 더 둘러 쳐져 있는 모양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