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문자추상의 세계

by김인구 기자
2013.08.23 10:32:48

포스코미술관 ''글자 그림이 되다'' 전
국내외 작가 33명의 작품 50점 무료 전시
조선시대부터 현대미술까지
회솨 속 서예정신 의미 재발견

김기창 ‘점과 선 시리즈’(사진=포스코미술관)
[이데일리 김인구 기자] ‘필가묵무’(筆歌墨舞). 서예의 최고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출 만큼 심오한 수준을 뜻한다. 10월 22일까지 두 달여간 이런 ‘필가묵무’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획전 ‘글자 그림이 되다’가 서울 대치동 포스코미술관에서 개최된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온 작가 33명의 ‘그림 같은 글자’ 작품 50점이 전시된다.

전시는 세 주제로 나뉜다. 시작은 ‘동양 서예의 전통을 만나다’다. 동양 정신문화와 조형예술의 뿌리가 되는 서예를 깊이 이해해 보는 자리다. 안평대군·이광사·강세황·김정희·서세옥 등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명품’ 서예가들이 보여준 필가묵무의 세계를 체험한다.

이 중에서도 이광사는 추사 김정희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다. 모든 서체를 잘 썼지만 행서와 초서에 특히 능했다. 글씨의 굴곡이 심하고 장단을 마음대로 조절하며 약간 비스듬하게 글을 써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글씨체를 남겼다. 사람들은 이를 그의 호를 따서 원교체라 불렀다. 그의 작품 ‘소옹 모춘음’에는 이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한눈에 봐도 글씨의 힘이 넘친다.

다음 주제는 ‘한국 추상, 서화일치를 넘어서다’다. 예로부터 서예는 문인에게 군자로서의 덕을 쌓는 자기수양의 방편이자 우주 만물의 진리가 담긴 생명 그 자체였다. 문자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 내용의 표현과 더불어 미적 감각의 회화적 요소도 드러낸다. 여기선 이응노·김기창·이우환·오수환 등 근·현대 미술가들의 역작을 선보인다.



이응노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던 한국화가다. 묵죽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후 일본에서 현실풍경화, 프랑스 파리에서 ‘문자추상’ 등 각종 실험적 시도를 거듭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인간 추상’은 1964년 한지에 채색한 콜라주 작품이다. 익명의 군중이 어울려 춤을 추는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어울림,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나타내려 했다.

이응노 ‘인간추상’(사진=포스코미술관)
김기창은 추상과 구상, 산수·인물·화조·영모·풍속 등 모든 영역에서 두루 뛰어났다. 동적이면서도 강한 붓놀림이 특징이다.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일제강점기 내내 유명작가로 활동했다. 추상화도 그렸지만 1960년대 후반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뒤에는 다시 변화를 일으켜 강렬한 필선과 적·황색이 두드러진 민화풍의 화조화에 매진했다. 이번에 나온 ‘점과 선 시리즈’는 그의 역동적인 붓터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주제는 ‘서양 추상, 동양의 서예에서 길을 찾다’다.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 개념이 추상인데, 이런 서양 추상미술의 근간에는 의외로 동양의 서예가 숨어 있다.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 한국 추상미술, 유럽의 앵포르멜(Informel)까지 조망한다. 서예가 지닌 추상성과 정신성을 자신의 작업에 응용했던 현대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동양 서예정신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살핀다.

앙드레 마송 ‘멱감는 여인’(사진=포스코미술관)
앙드레 마송·게르하르트 리히터·마커스 뤼페르츠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프랑스 출신 마송은 쉬르 레알리즘 활동을 하다가 1940년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를 오가는 변화를 보였다. 이어 2차대전 후에는 인상주의와 동양의 선불교에 관심을 갖고 인상주의 스타일에 동양의 서예기법이 섞여 있는 그만의 철학적 감성을 예술로 승화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멱감는 여인’에도 서예기법과 인상파 스타일이 혼재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 공휴일과 일요일에는 쉰다. 02-3457-1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