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물감이 화가를 죽였다

by오현주 기자
2013.02.27 09:33:51

화학자가 캐낸 명화의 숨은 과학
신윤복·미켈란젤로·에이크 등
천재화가 色 비밀 화학으로 풀어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376쪽|어바웃어북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미국에서 한 화가가 돌연사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인이 불분명하다. 한 가지 단서라면 그가 평생 흰색 물감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 미스터리한 의문을 추적한 결과가 나왔다. 납중독이었다. 납을 다량 함유한 흰색 물감을 과다하게 쓴 것이 원인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1860년대는 흰색이 대유행이었다. 흰색 안에 납 성분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화이트홀릭이던 그는 흰색 물감 중에서도 묘한 매력을 가진 연백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가는 제임스 휘슬러였다.

강한 독성의 물감을 서양에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그림에서도 보인다. 옛 화가들 중 유독 색채에 뛰어났던 이로는 단연 신윤복을 꼽는다. 그의 대표작 ‘미인도’엔 2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묘사된 색감이 보인다. 치마의 옥색, 속치마 고름의 붉은색이다. 특히 붉은색의 선명도는 놀라울 정도다. 이 붉은색은 진사라는 광물에서 얻어지는 주(朱)색으로 성분은 황화수은이다. 독성이 강하지만 변색이 안 되고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뿜는다.

예술품에서 과학을 보는 일은 자주 있다. 원근법이라든가 황금비율, 인체비례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중 화학을 특화시킨다면? 그것도 공학자가 분석한 미술품이라면? 국내 대학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인 저자가 미술과 화학의 접점을 찾았다. 그에 따르면 ‘미술은 화학에서 태어나 화학을 먹고사는 예술’이다. 특히 주목한 건 물감과 안료의 변화, 곧 색의 특성이다.



미술사를 뒤바꾼 것은 광택을 내는 불포화지방산이었다. 유화 탄생의 시작점이 됐기 때문이다. 그 분기점에 놓인 그림은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신부의 녹색드레스가 화려한 색감을 내는 건 불포화지방산인 아미안유를 이용한 정교한 붓터치 덕이다. 조선 3대 화가에 드는 장승업의 그림엔 조선 한지의 비밀이 숨어 있다. 한지가 먹의 퇴색을 억제한 덕에 그림이 여태껏 생생하다는 거다. 현대에서 쓰는 종이가 대개 산성인 탓에 문서보존에 취약한 반면 한지는 중성지다. 고서화들이 비교적 잘 보존된 까닭이 그것이다.

5년 동안 다듬고 보태 개정증보판으로 냈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에선 영화 ‘ET’가 패러디한 두 손가락 사이에 흐르는 교감 ‘터널링 효과’를 발견했고, 틴토레토의 ‘구리뱀’에서 앰뷸런스나 WHO 로고에 들어 있는 뱀 형상의 상징을 찾았다.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에선 청동의 진화과정을 캐냈다.

잘 알려진 명화를 보기로 삼았다. 늘 보던 그림만 즐비하다고 식상할 건 전혀 없다. 그 반대다. 유명화가 품고 있는 화학작용의 속내를 캐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학이 그려낸 명화. 미술관이 실험실로 보이는 특별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