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비밀정원 ''천리포수목원''

by조선일보 기자
2009.05.28 11:52:00

밀러 혹은 민병갈이 40년 가꾼 꿈결 같은 숲

[조선일보 제공] 오른쪽으로 휜 자갈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와" 하는 탄성이 입에서 새 나왔다. 커다란 호수. 호수 주변으로 색도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나무와 풀과 꽃이 만발하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풍광. 신(神)이 숨겨둔 정원에 실수로 걸어 들어간 기분이다.

신의 비밀정원 같은 이곳,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이다. 사람이 만들었다. 미국인 칼 밀러(Miller)로 태어났지만 한국인 민병갈(閔丙 )로 죽은 사내. 민병갈(1921~2002)은 24세에 미군 장교로 한국땅을 밟았다가 순박한 인심과 수려한 산천에 반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2002년까지 57년을 살았다. 1962년 한국은행 동료를 따라 만리포해수욕장에 왔다가 딸 혼수비용 걱정하는 노인을 돕는 셈치고 사들인 6000평 땅이란 '씨앗'이 18만평 수목원이란 '거목'으로 자랐다. 국제수목학회가 2000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했다. 1970년부터 심기 시작한 국내외 나무·풀·꽃이 1만5000여종. 목련류 400여종과 호랑가시나무류 370여종, 동백나무류 380여종, 단풍류 200여종 등은 국제적인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 천리포수목원 수생식물원. 설립자 민병갈씨가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다.

▲ 천리포수목원 해안전망대. 나란히 앉아 서해 낙조를 감상하기 알맞은 자리다. / 조선영상미디어


후원회원에게만 관람이 허용됐던 천리포수목원이 지난 3월, 40여년 만에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평일 평균 1000여명, 주말과 휴일 2000여명이 찾을 만큼 폭발적 인기다. 바닷바람으로부터 수목원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곰솔숲을 지나면 탐방코스가 셋 나온다. 일반적으로 A코스는 50분, B코스 1시간, C코스 1시간20분쯤 걸린다. 가장 긴 C코스를 골랐다. 각종 동백나무를 모은 동백원이 왼쪽, 연못이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연못 앞에 우산처럼 생긴 나무가 서 있다. 북미지역이 원산지인 '닛사(nyssa)'란 나무다. 우산살처럼 아래로 퍼진 나뭇가지에 잎이 달리면 안에 사람이 들어가도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앞 안내판은 '젊은 연인들이 이따금 나무의 안쪽으로 헤집고 들어가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C코스를 계속 걸으면 해안전망대가 나온다. 곰솔 아래 의자가 있다. 여기 앉아 서해 낙조를 감상하면 그만이다. 바로 앞에'낭새섬'이 보인다. 작은 무인도다. 원래 이름은 '닭섬'이나, 닭이라면 닭고기 냄새도 싫어했던 민병갈이 섬을 사들이자마자 '낭새(바다직박구리)가 서식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이름을 '낭새섬'으로 고쳤다.



전망대를 지나 구불구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왼쪽으로 호랑가시나무숲이다. 잎 모양이 호랑이 발톱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어 이름은 '홀리(holly)'. 잎 모양이 다양하고 꽃과 열매가 일년 내내 아름답다. 민병갈은 전 세계 호랑가시나무 370여종을 모았고, 한국 자생 호랑가시인 '완도호랑가시'를 발견해 국제학회로부터 공인받기도 했다.
 

▲ 천리포수목원 우드랜드(위). 청설모(아래).

하지만 천리포수목원의 대표 수종은 목련이다. 목련이라고 하면 흔히 4월에 꽃을 피운다고 알지만, 수목원에는 세계 각지에서 가져다 심은 목련 400여종이 일년 내내 돌아가며 꽃을 피운다. 천리포수목원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목련 때문이다. 민병갈은 한국 재래종인 산목련을 특히 좋아했다. 천리포수목원의 심벌도 산목련이다.

세 코스는 민병갈기념관과 편의시설 근처에서 만난다. 이 주변을 수목원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이들이 많다. 연못·방풍림이 있다.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연못이다. 수련으로 뒤덮인 연못 주변으로 꽃창포와 수선화 따위의 다양한 습지 식물이 보인다.

연못을 끼고 있는 원추리원은 낮은 구릉이다. 구릉 위 곰솔숲 가운데로 오솔길이 지나간다. 나무껍질을 두툼하게 깔아 걸으면 폭신하다. 오솔길을 걸어 매표소가 있는 출입구로 나가려는데, 연못 어딘가에서 "텀벙" 소리가 났다. 개구리일까. 민병갈은 개구리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죽어서 개구리가 될 거야"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가 개구리로 환생해 그토록 아꼈던 이곳에 돌아온 걸까. 연못에서 다시 "텀벙" 소리가 났다.

오전 9시~오후 5시. 설·추석 연휴만 쉰다. 관람료(하절기 기준) 어른 평일 7000원·주말 8000원, 청소년 평일 4000원·주말 5000원, 아동 3000원. (041)672-9982, www.chollipo.org

수목원 전체가 금연구역이며, 술 마시면 입장이 불가하다. 애완동물이나 카메라 삼각대, 음식물을 반입할 수 없다.

7채가 있다. 8명이 들어가는 한옥 '해송집'은 평일 10만원, 주말 13만원(3~6월·9~10월 기준). (041)672-99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