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읽는증시]독립운동가에서 증권맨으로

by전재욱 기자
2019.03.01 11:30:00

이승만 비서실장 이원순 1953년 한국증권 설립
광복군 박영준 1974년 서울증권 사장 취임
조선어학회 지원한 부친 섬긴 김용갑 증권거래소 이사장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자본시장 발전을 이끈 1세대 인물로는 이원순 선생(한국증권 회장)과 박영준 선생(서울증권 사장)이 꼽힌다. 김용갑 전 한국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이사장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이원순() 선생은 1890년 서울 출생이다. 보성전문대학(고려대학교 전신) 법학과를 졸업하고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을 창설한다. 이 선생은 미국 현지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이승만 박사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 고국을 찾은 그는 곧장 한국증권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증권은 주로 국채와 지가증권 매매를 중개했다. 지가증권은 정부가 1949년 농지개혁 당시 매수한 토지에 대한 보상금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 증권이다. 그러나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8년 국채파동과 이듬해 대(大) 증권파동, 1967년 증권파동 등을 거치면서 한국증권은 설립 1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고문(1979년), 백범기념사업회 고문(1984년) 등을 거쳤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보관문화훈장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93년 작고.

박영준() 선생은 1915년 경기 파주 출생이다.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1942년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들어갔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과장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광복 후에 귀국해 국군에 입대했다. 육군 9사단장으로 재직하던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현역 군인 신분으로 한국전력공사 사장에 취임한다.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한 선생은 1968년까지 한전 사장으로 재직했다.

재야에 머물던 박 선생은 1974년 12월 서울증권(현 유진투자증권) 사장으로 간다. ‘외부에서 거물급 인사를 초빙해 체제를 갖추는 증권사가 생기면서 업계 판도가 뒤바뀔 전망’이라는 평가(매일경제 1975년 1월25일 치)가 나왔다. 취임 신고식은 세게 치른 편이다. 서울증권이 1975년 1월 해태제과 `위조주식`을 위탁 매매해 투자자 손해가 발생했다. 서울증권은 1980여만원을 고객에게 배상해야 했다. 서울증권 사장에서 물러난 후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1981~1988년), 독립유공자협회장(1986년) 등을 거쳤다. △화랑무공훈장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등을 받았다. 2000년 별세했다.



김용갑 전 이사장은 국회의원을 지낸 김양수 선생의 장남이다. 김 선생은 조선어학회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1942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김 전 이사장은 귀국해서 부친 옥바라지를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고 서울대 상대 교수와 재무부 차관으로 근무했다.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취임한 때는 1971년이다. 한 차례 유임하면서 1977년까지 재직했다. 이 기간에 증권거래소 개혁을 이끌었다는 평이다. 특히 상장사 수시공시제도를 마련해 투자자 간 정보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 점은 평가를 받는다. 현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한국거래소 기공도 김 전 이사장 재직 당시 이뤄졌다. 장소물색, 대지매입, 건물 규모 등 김 전 이사장이 직접 손을 댄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작고했다.

셋의 만남도 흥미롭다. 1975년 1월10일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열린 상장회사 남양(南陽)소금 주주간담회는 업계 주목받았다. 회사가 정기주주총회 안건을 확정하기에 앞서 주주의견을 듣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주주가 안건을 일방으로 정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간담회는 경영자와 투자자 간 협조 체제를 확고히 하는 점에서 호평’(매일경제 그해 1월13일 치)이라는 평가나 나왔다. 40여 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날 그 자리에 주주대표로 박영준 선생과 김용갑 전 이사장이 참석했다. 둘은 서로가 독립군 (집안)이라는 점을 알았을까.

반면에 이원순 선생과 박영준 선생이 한날 한자리에 모인 동정을 다룬 소식(기사)은 찾기 어렵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서 회장(박영준)과 고문(이원순)을 맡았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