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사랑스러운 인도 남부여행

by경향닷컴 기자
2009.03.11 12:25:00

(上) 유럽과 인도가 섞여있는 ‘코치’

[경향닷컴 제공] 흔히 ‘인도’하면 시끄러운 경적, 불결한 거리, 달려드는 걸인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분 맞는 얘기지만 인도가 다 그렇지는 않다. 인도는 인종도, 종교도, 삶도, 풍경도 다양한 나라다. 인도 남부에는 유럽풍 도시도 있다.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인도 남부를 다녀왔다. 여긴 다른 재미가 있다. 2회에 걸쳐 ‘남인도’를 소개한다.

▲ 포트리스 코치에 여행온 외국인 관광객이 자전거를 세워놓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벽은 하얗거나 노랬다. 낙서 한 자 없었고, 벽보가 너절하게 붙어 있지도 않았다. 집집마다 화분을 내놨다. 화원의 세련된 장미가 아니라 거리의 덩굴에서 막 딸 수 있는 ‘길거리 장미’ 같이 흔한 꽃이었다. 그래도 예뻤다. 카페 창문 아래서 소들이 화분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풀을 뜯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노란 벽엔 자전거가 두어대 세워져 있고, 건너편 호텔 앞엔 흰색 클래식카가 주차돼 있었다. 관광용으로 제작한 앰배서더란 모델인데 1960년대 풍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차였다. 이 호텔 앞에서 중년의 백인이 눈인사를 해왔고, 배낭을 맨 백인 연인들이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여기가 인도야? 아니면 유럽이야?” 소음과 경적, 판잣집과 빌딩숲 사이에서 헤매던 뭄바이와는 딴판이었다. 여긴 포트리스 코치. 코치란 도시의 구도심이다.

작고,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역사도 깊다. 거리에서 악기나 인형을 파는 인도인만 없다면 유럽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포트리스 코치는 무역항이었다. BC 3세기부터 이집트,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등과 향신료를 사고팔았던 고도다. 중세에는 아라비아 상인도 드나들었다. 무역항의 역사로 치면 인도에서 가장 오래됐다. 그럼 언제쯤 이 도시는 이렇게 유럽식으로 탈바꿈했을까?

▲ 포트리스 코치의 어민들이 사용하는 중국식 어망.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를 발견한 뒤부터일 것이다. 가마는 1498년 코치 북부 캘리컷에 상륙했다. 이후 그는 1502년부터 1524년까지 세 차례 인도를 방문했다. 세 번째 그가 인도에 왔을 때 포르투갈 정부는 그를 인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코치에서 죽었다. 이 마을에는 1510년에 세워진 성 프란치스코 교회가 있는데 교회 내부에는 바스코 다 가마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까지 표시돼 있다.

교회 옆길을 따라 마을을 훑어봤다. 호텔도 대부분 2~3층 정도의 유럽 스타일이다. 바스코 다 가마란 호텔도 보였다. 가이드 고팔은 “여기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머물 때 살던 집인데 기록은 없다”고 했다. 그 옆에는 가마의 이름을 딴 카페와 서점도 붙어 있다. 책방에 전시된 책 중에는 때묻은 중고서적도 많았다. 여행지에서 이런 서점을 만나면 부럽다. 때묻은 책에는 선배 여행자들의 정취가 배어난다.

저물 녘 포트리스 코치의 해안으로 여행자들이 몰려왔다. 유럽인도 있었고, 인도인도 많았다. 한국인 배낭여행자 2명은 남인도에서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고 즐거워했다. 4개월째 인도를 떠돌고 있단다.

이들이 해안에 몰려온 것은 중국식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를 보기 위해서다. 가로 세로 4~5m 정도의 거대한 4각형 뜰채그물을 물속에 담가놓았다가 건져내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꽤 이채롭다. 해안가에는 이런 어망이 십여개 이상 설치돼 있는데 정작 그물질을 하는 곳은 딱 하나다. ‘고’라고 이름을 밝힌 어부는 “손바닥만한 바다 메기를 보여주며 쓰나미 이후 물고기들이 사라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중국식 어망은 1400년대에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요즘 중국에선 볼 수 없단다. 1400년대라면 명나라의 정화제독일 가능성이 높다. 1409년 그가 포루투갈인보다 먼저 인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정화제독은 영락제가 황제에 오른 뒤 세계 최고의 함대를 거느리고 대항해를 떠났다. 길이 135m, 폭 55m의 대형선박 62척 등 모두 317척의 대함대였다. 200년 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고작 130대 정도였고, 80여년 뒤 콜럼버스의 배도 크기로 치면 중국 선박의 절반 수준이었다. 명나라는 당시 세계 제일의 해양강국이었다. 영국의 잠수함 함장출신의 개빈 맨지스는 <1492년 콜럼버스>에서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정화가 미 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어쨌든 역사는 흔적을 남겼다. 포트리스 코치는 중국, 포르투갈, 인도가 버무려져 있다. 퓨전이다.

▲ 향신료를 팔고 있는 코치의 인도 점원.
왜 이들은 코치를 선택했을까? 바로 향신료 때문이다. 케랄라 지역은 향신료가 많이 났다. 그 흔적은 코치시의 남부 마타나체리란 마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마을 역시 고풍스럽다. 마을 끝자락에는 향신료 창고와 함께 향신료를 거래하는 상가가 많다. 현지에선 마타나체리를 유대인마을로 불렀다. AD 72년에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왔는데 타고난 장사꾼이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가게에는 다윗의 별로 불리는 육각형의 별이 많이 장식돼 있다. 마을 끝에는 유대인 회당도 있는데 바닥은 150년 가까이 된 중국식 타일을 깔았고, 100년이 넘는 유리등이 걸려 있다. 유대인의 역사를 그려놓은 그림에는 기원전을 BC 대신 BCE로 써놓았다. ‘Before Common Era’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AD와 BC를 쓰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그럼 중국타일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인도인 통치자가 상인에게 사온 것인데 타일에 소피가 묻었다고 거짓말을 했던 거예요. 소를 신성하게 여긴 이 지역의 통치자는 타일을 버렸고, 그걸 가져다 쓴 거죠.”

유대인들의 ‘잔머리’가 놀라울 뿐이다. 지금 유대인들은 많이 떠났다. 현재 이 마을 유대인은 11명뿐이다.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1900년을 살아온 이들도 팔레스타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인도는 지역마다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코치는 아마 점잖은 신사적인 인도의 모습일 것이다.





▲ 도비가트의 빨래터.
인도는 다른 우주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산다. 외국인의 눈에는 상식을 뒤엎고, 논리로 설명 안 되는 일도 많다. 이것이 인도 여행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재미기도 하다. 상식과 선입견의 전복을 즐길 줄 알아야 인도 여행이 즐겁다.

천민들의 빨래터다. 상류층의 빨래를 하며 이들이 한 달에 버는 돈은 10만원에 불과하다. 외국인들은 슬럼가나 걸인을 보면서 카스트에 묶여 있는 천민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지만 정작 이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인도의 역사를 들춰보면 반란은 있었지만 신분 타파 등을 목적으로 일으킨 혁명은 없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레닌도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자본론도, 볼셰비키 혁명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 행복을 찾지 않는다. 자신의 속에서 행복을 본다.

거리를 쏘다니는 소를 보면서 비웃는 여행자들이 있다. 물론 교통에 방해되고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도는 동물애호가들이 본다면 선진국일 수 있다. 동물애호사상은 동물도 평화롭게 살고 죽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 중에는 좁은 공간에서 험하게 길러진 공장식 사육고기를 먹지 않겠다며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인도는 채식문화가 가장 발달된 나라다. 어느 식당이나 채식 메뉴가 따로 있다. 동물을 학대해온 역사를 보면 서양도 만만치 않다. 불과 200여년 전 프랑스에서는 사육제 기간 동안 고양이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산 채로 태우거나 때려 죽였다. 만약 지금 유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동물학대 혐의로 당장 구속될지 모른다. 간디는 동물을 대하는 것을 보면 한나라의 문명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과연 인도가 후진적인가?

자이나교도들은 하루살이가 입으로 들어올지 모른다며 입을 가린 채 공양을 할 정도로 살생을 싫어했다. 이들은 저녁 늦은 시간엔 파리가 음식에 들어간 줄 모르고 먹을까봐 식사도 하지 않는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다. 인도에는 뭄바이 한가운데 조로아스터교의 조장터도 있다. 2000만명이 사는 대도시에서 시신을 새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신들과 살아가고 있다. 그게 인도다.

인도 영화는 춤으로 끝난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도 마찬가지다. 인도인은 할리우드만큼이나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늘 희망으로 마지막을 매듭짓는 사람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재밌다.

인도는 시끄럽다.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을 울려대기 때문이다. 웬만한 차에는 백미러가 없다. 그래서 경적은 앞차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으로 울리는 ‘깜빡이 등’과 같다. 이게 과연 IT 선진국인가? 뭄바이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것이 인도인이라니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인도 여행에선 생각의 경계선이 허물어진다. 다른 세계에 대한 관용정신이 있어야 인도가 편하다. 그게 인도를 즐기는 방법이다.



*서울에서 코치까지 직항편은 없다. 뭄바이나 델리 등에서 매일 한 편씩 들어간다. 인도 2민항인 제트 에어웨이스의 서비스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비즈니스 클래스는 의자가 완전히 한일(一)자로 펴진다. 대한항공, 캐세이패시픽항공 등과는 항공요금 정산협정이 돼 있어 서울~방콕~뭄바이~코치, 서울~홍콩~뭄바이~코치 등 구간표를 함께 끊을 수 있다. 제트에어웨이스(www.jetairways.com), 한국사무소 (02)317-8756.

*케랄라는 사시사철 덥다. 2~5월까지가 여름이다. 24~33도. 6~9월은 우기다.

*인천공항에서도 인도 루피 환전을 해준다. 인도 현지에서는 1US달러에 50루피 정도다. 호텔은 48~49루피, 길거리에 나가면 환전상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물을 조심해야 한다. 물은 반드시 생수를 사먹자.

*포트리스 코치에는 여행자 숙소가 많다. 이 일대에는 유럽인들이 많이 묵는다. 와인바나 맥주집도 있다.

*전통문화를 보려면 신도시 격인 에르나쿠람에 가면 카타칼리를 볼 수 있다. 분장하는 모습도 관람이 가능하다.(www.keralatouris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