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아서)④기업이 환율책임도 지는···

by김상욱 기자
2008.12.26 10:31:24

환율, 올라도 내려도 기업책임
기업들 "외환시장 안정에 노력하겠다" 보도자료까지

[이데일리 김상욱 김국헌 기자]
 
2006년 11월28일 한국무역협회 주최로 열린 '수출 3000억달러 달성 기념 국제컨퍼런스'.  권오규 당시 경제부총리는 "최근 환율 급변동은 대형 수출업체들의 과도한 환헤지 등에 따른 쏠림 현상에도 일부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수출업체는 물론 중소기업의 어려움도 가중시키는 것이므로 시장상황에 대한 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당시는 달러-원 환율이 900원대 초반으로 하락하며 수출전선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2008년 10월8일 청와대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오찬간담회.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가 어려울 때 개인이 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며 "달러를 사재기하는 기업과 국민이 있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달러가 자꾸 귀해지니까 달러를 갖고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달러를 사재기 하는 기업이 좀 있는 것 같고, 일부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며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 하루전인 7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환시장이)너무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투기적 요인에 의한 수요가 있다는게 정부의 판단"이라며 "투기적 거래를 하는 자와 대기업에 대해 현황을 파악하겠다"고 밝혔다. 달러-원 환율이 1300원대로 급등하던 시점이었다.

약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외환당국이 바라보는 수출 대기업들에 대한 시각은 이처럼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외환시장에서의 환율 변동성이 커진다 싶으면 어느새 이들 수출 대기업들은 주연은 아닐지라도 비중이 적지않은 조연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국가경제라는 '명분'에 눌린 기업들의 목소리는 일종의 '변명'정도로 평가절하된다.
 
그리고 이들 기업들은 이내 환율을 높이든 낮추든 환율방어의 일선에 나서는 상황이 반복된다. 기업들이 환율방어에 나서야 하는, 그리고 이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에서 기업들은 '힘이 빠진다'고 털어놓는다. 



지난 10월 대통령이 직접나서 '달러 사재기'라는 경고성 발언을 내놓자 당연히 재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전경련은 삼성, LG, 현대차, SK 등을 비롯한 20대 그룹의 자금담당 임원들이 모아 긴급점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금담당 임원들의 분위기는 "잘못 해석된 부분이 있다"며 다소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자체 사업구조상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 많을 수 밖에 없는 기업이 있다. 또 내부적인 결정에 따라 외환관리차원의 환헷지를 해야 하는 기업도 있다 .그런데 이를 통틀어 '투기성'로 해석해선 안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회의를 전후해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들은 잇따라 외환시장에서 적지않은 달러를 매도했다.
 
정부에 대한 일종의 '성의표시'를 한 셈이다. 그 결과 달러-원 환율 상승세는 단기간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환율은 이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개별기업에게 외화를 팔아라, 말아라 얘기하는 것은 시장에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며 "오히려 심리적으로 정부가 초조해한다는 시그널을 줄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기업이라고 해도 여유로 외화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정책적으로 원하는 방향이 있더라도 반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는 여유가 아쉽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을 포함한 모든 시장참여자들은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자선사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수출기업 관계자는 "환율상승이 수출업체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원재료 수입비중이 높은 기업의 경우 상황이 다를 수 있다"며 "동전의 한면만을 보고 접근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올해초 수출확대를 목표로 원화 약세를 일정부분 용인해온 것이 사실 아니냐"라며 "정부가 속도조절에 실패한 측면이 있는데 막상 상황이 어려워지니 기업들이 시장안정을 저해한 요인처럼 화살이 돌아왔다"고 비판했다.



대기업의 달러보유에 대해 정부의 비판이 쏟아지던 10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환율상승에 대한 영향과 입장을 정리한 참고자료를 보내왔다. 자신들이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에 대한 처리방침, 환율상승에 따른 영향 등을 설명하는 자료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중 하나이다 보니 언론들의 문의가 빗발쳐 아예 참고자료를 냈다는 것이 해당기업의 설명이었다. 물론 이 기업말고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다른 대기업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범위안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자료 말미에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기업들이 정부의 환율정책에 휘둘리는 '한국적 상황'이 반영된 문구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실제 이 기업은 해외언론에게 배포한 자료에는 이같은 표현을 담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물론 정부가 지적한대로 일부 기업이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것을 이용해 투기적 성격의 거래를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그런 기업들은 당연히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기업이 외화에 대한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경영상 관점으로 접근하면 된다"며 "외환시장의 안정까지 감안하면서 경영상 판단을 내릴수는 없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출범초기부터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해왔다. 하지만 정부가 의도하고 기업이 바라는 진정한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기업규제 완화와 같은 굵직한 현안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다.

시장경제라는 틀안에서 기본적인 '상식'이 지켜져야 한다. '한국적 상황'이란 이유로 바로 두달전 외환시장에서 기업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이 다시 재연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