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06.10.25 12:10:00
유행 먹고사는 ‘패션계의 실상’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5일 개봉)에는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 기껏해야 좀 독특한 분야에서 일하게 된 사회초년생의 좌충우돌 적응기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로렌 와이스버거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깔끔하고 세련된 화술로 영화화한 이 작품은 흥미로운 상황의 힘을 최대한 활용한 에피소드들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패션계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코미디 영화치곤 전개가 빠르고 편집이 적극적이며 음악도 효율적이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메릴 스트립의 탁월한 연기다. 뛰어난 능력과 차가운 성격을 지닌 패션계 거물 역(미국판 ‘보그’의 편집장으로 권위와 성깔이 대단해 ‘핵폭탄’으로 불리는 안나 윈투어를 염두에 둔 캐릭터)을 맡은 스트립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카메라의 갖가지 앵글 안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자신감으로 냉정하게 굳힌 표정 속에서도 미묘한 변화로 다양한 심리 상태를 생생히 표현하고, 파워 넘치게 구사하는 위압적 단문형 어투로 내내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 정도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이어 27년 만에 다시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안을 만도 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메릴 스트립의 초강력 자장 속에서도 앤 해서웨이는 제 몫을 했다. ‘모두들 44 사이즈에 목숨 거는’ 직장에서 태연히 66 사이즈를 고수하는 앤드리아 역의 해서웨이는, 이전 출연작 ‘프린세스 다이어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촌뜨기 같은 전반부와 눈부시게 차려입은 후반부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이며 판타지의 재미와 리얼리티의 감흥을 함께 표현한다.
현대의 신데렐라는 호박 마차와 유리구두가 아니라, 프라다를 챙겨 입고 지미 추를 찾아 신은 채 파티장으로 간다. 이 영화 제목이 애써 주장하듯, 그게 설사 ‘악마’의 차림새라고 해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신데렐라의 휘황한 꿈과 그 꿈을 지탱하기 어려운 평범한 삶 사이의 값비싼 딜레마에 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