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경제 보기]‘국가 부도의 날’…위기를 앞에 둔 우리의 자세는
by이명철 기자
2019.02.02 09:24:16
갈피 못 잡던 정부·금융당국…IMF에 경제 주권 잃어
달러·주식·부동산·채권 손 댄 금융맨은 자산가로 우뚝
가계부채 시한폭탄…지금도 위험? 대응은 우리 자유
[이데일리 이명철 기자] 영화를 좋아하는 경제지 기자입니다. 평론가나 학자보다는 식견이 짧지만 ‘가성비’ 좋은 하이브리드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영화 속 경제 이야기를 제멋대로 풀어봅니다. [편집자주] ※글 특성상 줄거리와 결말이 노출될 수 있습니다.
| 영화 ‘국가 부도의 날’ 포스터.(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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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라’가 부족하면 사면 되는 거 아이가”
“각하, 달러를 사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한국은행 총장(권해효)의 대답에 대통령(故 김영삼으로 추정되는)이 짧게 탄식합니다. “잔치는 끝났다, 이긴가(이 말인가)….”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경제 주권을 잃었던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삶이 팍팍한 요즘, 남의 이야기 같지 않던 1990년대 생활상은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속수무책이었던 정부 관계자들과 달리 종금사에 근무하던 윤학진(유아인)은 국가 부도에 베팅하며 막대한 돈을 버는 모습은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선사합니다.
외환위기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위기(누군가에게는 기회)는 또 다시 다가온다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번에도 기회를 잡는 윤학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는 국민 대부분이 겪은 큰 사건입니다. 저와 같은 30대(후반이지만)에게는 다소 우울했던 청소년기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죠.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는 항상 딜레마에 빠집니다. 객관적인(조금은 따분할 수도 있는) 사실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이 스스로 극장을 찾을 만큼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국희 감독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이라는 가상의 인물(김혜수)과 그에 반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즉 악역으로 재정국(지금의 기획재정부) 차관(조우진)을 설정합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공과 사사건건 이를 막는 반대파를 내세워 선과 악의 구도를 만듭니다. 주인공과 공감대를 형성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죠.
다만 너무 분명한 선과 악의 논리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습니다. 김혜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 부도 상황을 예견하고 꾸준히 경종을 울렸으며 권력자들 앞에서 직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죠. 그가 원하는 것은 분명하고도 선합니다. ‘현재 상황을 빨리 알려 국민들의 혼란을 덜어주자’는 것입니다.
조우진은 사실상 매국노로 치부됩니다. 국가 비상사태를 숨기는 대신 유력 그룹의 후계자에게 정보를 흘리고 ‘파업이나 해대는’ 국민들을 이 기회에 싹 뜯어고치기 위해 기꺼이 IMF의 구조조정을 수용합니다.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잇속만 챙기는 기득권의 천태만상은 최근 ‘변호인’ ‘내부자들’ ‘더킹’ 등에서 숱하게 봐왔습니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라는 그들만의 속삭임도 더 이상 은밀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현실적인 한계 앞에서 실패하는 모습도 보이고, 경제정책 책임자로서 어쩔 수 없는 악역의 고뇌도 그렸다면 관객은 더 모이지 않았을까요. 물론 국가 부도의 초시계가 돌아가는 상황에서 정부, 금융맨, 중소기업 사장의 혼란까지 숨 가쁘게 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만.
확고한 캐릭터의 매력은 돋보였습니다. 이대 나온 정마담을 연기하던 김혜수는 통화 정책을 전반을 다루는 전문가로서 폭 넓은 연기 내공을 보여줬습니다. 최근 개봉한 ‘마약왕’에서도 열연한 조우진의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 경제 용어들을 풀어주려는 시도도 재미있습니다. 김혜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부분 외국 투자자들은 롤오버, 즉 빌려준 돈에 대해 만기를 연장해준다는 의사를 보였다”며 ‘롤오버(만기연장)’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계는 있죠. 용어가 나올 때마다 저렇게 풀어줄 수는 없으니까요. 감독도 언론과 인터뷰에서 “경제 용어를 꼭 설명하지 않아도 감정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 유아인은 김혜수와 조우진 못지않은 존재감을 보입니다. 고려종금이란 종합금융사에서 개인자산 관리를 맡던 그는 해외투자자의 국내 투자자금 회수와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보고서는 국가 부도 사태를 예견합니다. 마치 족집게처럼 앞으로 투자의 맥을 잘도 찾아냅니다.
유아인과 두 명의 투자자는 달러 매입부터 나섭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1997년 11월 18일 원달러 환율은 843원(이라고 영화는 표기했지만 한국은행 통계자료에 따르면 11월 중순에는 1000원 안팎)입니다. 그는 환율이 2000원까지 오를 거라고 예상합니다. 달러 가치가 3배 가까이 뛸 것으로 본거죠. 같은해 12월 23일 원·달러 환율은 1962원을 찍습니다. 실제 은행에서 거래는 2000원이 넘었으니 유아인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네요.
그는 더 나아가 “주식이 폭락하고 환율이 폭등하면 돈을 버는 풋옵션을 만들어야지”라고 다짐합니다. 돈을 알차게 벌어보자는 다짐이죠.
옵션이란 말 그대로 옵션을 걸어놓은 투자상품입니다. 실시간으로 현물 증권을 거래하는 주식과 달리 특정일에 미리 정해놓은 가격으로 사거나(콜) 파는(풋) 권리를 정해놓는 것이죠. 풋옵션은 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하락장에 베팅하는 투자 방식입니다.
일반 주식시장과 달리 가격 제한폭이 없기 때문에 리스크도 크지만 투자 매력은 상당합니다.
코스피200지수가 전일대비 4.41%나 빠졌던 지난해 10월 11일에는 200배의 수익을 거둔 풋옵션 상품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억원을 투자했다면 200억원이 된 겁니다. 비트코인 저리가라 할 만한 수익률이죠. 9·11 테러가 발생했던 2001년 당시 미국에서는 풋옵션으로 500배 수익을 거둔 투자자가 있었다고도 하네요.
1997년은 국내에도 옵션시장이 개설된 해입니다. 그리고 극중 유아인은 증권사를 찾아가 주식 하락과 환율 상승에 베팅한 옵션 상품을 개설합니다. 예상은 적중합니다. 그해 10월 600선을 넘던 종합주가지수는 12월 한때 350선까지 떨어집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급매물로 나온 아파트들은 물론 채권까지 사들입니다. 모두가 알 듯 외환위기 후 집값은 급등합니다. IMF는 12.5% 수준인 금리를 30%로 인상하라는 주문을 내리기도 하죠. 이때 거둬들인 막대한 부로 유아인은 대형 금융투자회사의 회장이 됩니다.
영화는 말미에서 2018년 현재를 다룹니다. 미국 헤지펀드의 불안한 움직임, 강남 부동산 동향과 가계부채 폭탄에 대한 우려가 나옵니다. 실제 최근 국내 주식시장은 단기 차익을 바라는 외국계 헤지펀드 수급에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가계부채는 연일 증가하며 1500조원을 넘었습니다. 서울·수도권 집값 하락세도 심상찮죠. 미국과 중국에서 경고음도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또 다른 위험의 전조일까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위기가 오지 않기를 바라야 할지, 위기에 베팅할지 길은 열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