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쌓고 바람이 깎은 반도의 절경… 적벽강

by조선일보 기자
2009.08.27 12:20:00

전북 부안

[조선일보 제공] 옛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기 좋다고 꼽는 '피난 명소'를 요즘 사람들은 풍경 좋은 휴식처로 삼는다. 옛 풍수지리가들이 천재(天災)나 싸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고 여긴 십승지지(十勝之地)에 속하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도 그 중 하나다. 늦여름 태양의 열기가 따가웠던 8월 중순, 은둔의 흔적을 찾아보려 부안군 지도를 펼쳤다. 남북을 관통하는 서해안고속도로가 굵은 사인펜으로 단숨에 그은 듯 선명하다.

"십승지지가 꼭 오지를 뜻하지는 않지요. 그만큼 지세가 좋아 사람을 보호해준다는 뜻일 거에요. 부안 사람들은 그 좋은 기운이 모인 곳으로 적벽강을 꼽아요."

문화관광해설사 고윤정(44)씨 설명을 듣고 서쪽 끝 적벽강(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252-20)으로 향했다. 중국 적벽강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그 이름을 빌린 변산의 적벽강은 강이 아니라 2㎞ 정도 이어지는 해안선이다. 낡은 책 수만권을 쌓아놓고 무딘 칼로 쓱쓱 잘라낸 듯, 켜켜이 축적된 바닷가 절벽은 먹먹하고 고요했다. 무녀(巫女)로 보이는 네 명이 색색의 천을 잡고 길게 찢는 모습은 묘하게 경쾌해보였다.

▲ 전북 부안 적벽강엔 어부들을 보호한다는 개양할미의 전설이 서렸다. 한때 뿌리 박았던 바위가 쓸려 나가 스러진 적벽강의 한 나무. 죽은 가지를 움켜쥔 산 나무들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절벽에 매달려 있다. /조선영상미디어

이곳을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 이유에 대해 고윤정씨는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을 보호했다는 개양할미 때문"이라고 했다. 적벽강 절벽 위에서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수성당(水聖堂)은 한때 조기 잡는 바다로 유명했던 칠산바다를 향한다. 어부들을 보호하는 여해신(女海神)의 이름이 '개양할미'고 개양할미에게 제(祭)를 지내던 곳이 수성당이라고 전해진다. 키가 엄청나게 커서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수심을 재고 바람을 통제했다는 개양할미의 모습을 상상하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풍랑'을 이 잔잔한 바다에 잠시 풀어놓고 간다.



적벽강에서 변산해안도로를 따라 남으로 가면 근처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격포항, 약 7000만년 전 퇴적암이 바닷가에 펼쳐진 채석강(역시 강은 아니며, 공사 중이라 약간 번잡하다), 염전과 젓갈로 이름난 곰소항을 거쳐 줄포자연생태공원(부안군 줄포면 우포리)에 닿는다.

공원 입구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인공섬 부근 호수엔 통통하고 깨끗하며 사람과 노는 걸 취미로 삼은 듯한 오리 아홉 마리가 살고 있다. 한 봉지에 1000원짜리 오리 모이를 파는 공원 안 '거시기네 장터'의 한 아주머니는 "한 식구인가요(오리들이 한 혈통인가요)"라는 질문에 자기네 가족 이야기하듯 단번에 "네!"라고 답했다. 단단한 모이를 사서 한 주먹 가득 쥐고 물에 던졌다. 오리들은 주황빛 물갈퀴를 탐방탐방 저어 우우우 몰려가더니 신나게 모이를 낚아챈다. 통화라도 하며 딴청을 피울라치면 물에서 금세 걸어나와 어서 밥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다. 아기처럼 떼쓰다가도 모이 봉지가 비는 순간 미련 없이 뒤뚱뒤뚱 돌아서서 물로 쏙 뛰어드는, 얄밉지만 똘똘한 오리와 놀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갔다. 어느새 호수 저편으로 가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는 오리를 구경하며 바람 잘 통하는 원두막 기둥에 기대앉았다. 천재(天災)와 싸움 걱정이 낮잠의 유혹 속에 스르르 녹는다.



633년 창건한 내소사(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063-583-7281)는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600m 전나무길이 상쾌하다. 갯벌체험은 모항(변산면 도청리 123·063-584-7788) 등에서 가능하다. 격포항(063-581-1997)에서 여객선을 타고 40분 정도 가면 낚시, 등산, 드라이브를 고루 즐길 수 있는 위도(www.iwido.kr )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