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
by조선일보 기자
2009.08.19 11:36:00
[조선일보 제공] 걷기가 유행이다. 제주도 올레길엔 금년에 현재까지만 약 10만 명 가까이 다녀갔다고 한다. 걷는 사람들도 아주 다양하다. 어린 초등학생부터 노인층까지 있으며 친구들끼리 혹은 부부끼리 걷기도 하고 혼자서 걷는 사람도 많다. 걷기 위해 만들어진 길도 여럿 생겼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제주 올레길,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이다.
‘올레’란 집에서 큰 길까지 나 있는 마을 길을 일컫는 제주도 방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올레길은 꼭 그런 골목길은 아니고 제주의 풍광을 담은 해안 및 산간의 여러 길들을 이어놓은 트레킹 루트다. 제주도가 고향인 기자 출신의 중년 여성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제주도에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주변 친지들과 함께 내고 있는, 채 2년이 안된 길이다. 현재까지 제주도 남쪽을 따라 약 200km가 만들어진 길은 대부분 기존 길을 서로 이은 것이지만 군데군데 새로 뚫은 구간도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남한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지리산을 빙 둘러가는 길이다. 지리산 생태보전운동을 펼쳐온 ‘사단법인 숲길’에서 지리산의 마을과 마을을 잇던 옛길을 되살려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2007년부터 만들고 있는 길이다. 다 이어지면 총 300여 km가 될 것이며 현재는 지리산 북쪽으로 약 70km가 만들어져 있다.
걷기라면 소시 적부터 좋아하던 내가 아닌가. 기회를 보던 차에 이번 여름에 틈을 내어 올레길과 둘레길의 일부구간을 다녀왔다. 역시 좋았고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래서 아직 기억이 따끈따끈할 때 두 구간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비교는 결국 주관적 판단에 의한 비교여서 얼마나 객관적 타당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 최대한 객관성을 담보하자는 취지에서 백두대간 길을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고자 한다.
사람들이 걷고 싶을 때는 콘크리트에 갇힌 도시생활에 지쳐있을 때가 많다. 인공적인 모습들로부터 탈피하여 자연 속의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꾸밈이 없는 자연의 길을 찾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자연의 길은 백두대간 길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지형의 등뼈를 이루는 대간 길은 평균고도가 1000 미터가 넘는 높은 곳이라 개발의 영향을 그만큼 덜 받았고 길의 특성 상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대간능선의 봉우리에 올라서서 눈앞에 펼쳐진 백두대간의 힘찬 뻗어감을 보면서 느끼는 장쾌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 땅 한반도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든다.
또 대간 원시림 숲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청량감과 온 몸으로 퍼져 드는 싱싱한 생명의 기운은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대간 길을 하루 걸으면 헝클어진 마음이 차분해지고 이틀을 걸으면 건강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난다. 때문에 백두대간에 한번 맛들인 사람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이어지는 남한 구간 740km를 종주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마력을 지닌 산길이다.
그러나 백두대간 길은 일반인이 걷기에는 너무 힘든 길이다. 우선 하루에 걸어야 하는 구간 거리가 보통 20km 정도 된다. 산행 시간만 보통 10시간 정도 걸리며 수없이 많은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므로 체력적으로 힘든 여정이다. 중간에서 내려오려 해도 길이 마땅치 않다. 또 능선길이니 만큼 물을 2리터씩은 짊어지고 가야하고 10시간 산행에 필요한 음식에다 비상시를 대비한 준비물까지 합하면 배낭도 무거워진다. 그래서 좋은 줄은 알지만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은 백두대간 길의 이런 체력적 부담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지도 않고 두 길 모두 하루에 걷는 거리가 평균 10 -15km 정도다. 그나마 힘들면 중간에서 멈추고 다음에 다시 시작하는데 아무 무리가 없다. 중간에 마을들이 있기 때문에 택시를 부르면 된다. 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갈 필요도 없다.
이번에 두 길을 걸으면서 내 배낭에는 0.5리터짜리 생수병 하나밖에 없었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간에 휴게소나 식당이 있어 음식을 사먹을 수 있으므로 따로 음식을 싸갈 필요도 없다. 그러니 튼튼한 신발과 햇빛을 막을 챙 큰 모자 정도가 필요할 뿐 크게 준비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다.
제주 올레길의 가장 큰 장점은 빼어난 풍광이다. 말미오름에 올라서면 시원스레 펼쳐지는 성산 앞바다가 그림 같다. 풀밭에선 고삐조차 없는 말과 소가 풀을 뜯는 모습이 꾸밈없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다. 왼쪽으로는 검푸른 바다의 파도가 넘실대고 오른쪽으로는 초록색 초지가 바다처럼 펼쳐진 신풍 바다목장 올레 길을 걷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올레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편리한 길이다. 중간에 가게와 식당들이 있어 불편함이 없다. 나는 자리회가 얼마나 맛있던지 매일 먹었다. 자리회 맛은 동네마다 달랐지만 맛있다는 건 공통적이었다. 편리함이 있어서인지 이 길엔 여성 손님이 많다. 친구들끼리 혹은 딸과 엄마가 손잡고 쫄깃하게 말린 한치를 씹으며 수다 떨며 가는 길이다. 무슨 음식을 어떻게 해먹으니 맛있더라는 얘기를 하면서 바닷가를 걷는 여인들이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비판정신에 투철한 먹물이라선지 장점만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흙길이 너무 없었다. 오름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시멘트길 아니면 아스팔트길이다. 아마 전체구간의 80% 이상 되지 않나 생각된다. 자연의 보드라운 흙길을 상상하며 온 사람들은 이 부분에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단지 실망만 줄 뿐 아니라 딱딱한 시멘트 길은 실제로 발목에 무리를 주며 쉽게 피로를 가져다 준다. 올레 길 10여 km 걷고서 느끼는 발의 피로감은 대간 산길 20km 걷는 것보다 높았다. 올레길 갈 때는 필히 바닥 쿠션이 좋은 신발을 권한다.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발견하는 제주 올레길의 보다 큰 문제점은 길이 자연스럽게 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길을 연결한 사람들은 길이 서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제주의 특색있는 모습이 길에 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고려사항은 서로 충돌할 수가 있다. 예컨대 특색 있는 모습을 굳이 포함하려다 보니 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청룡열차 궤도처럼 휘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길을 걸으면 마음 또한 불편해진다. ‘보이려고 꾸미는 것’(爲)은 ‘꾸밈없이 보여주는 것’(無爲)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길의 꺽임을 찾아가려니 진행방향을 나타내는 표식 또한 찾기가 어려웠다. 올레 길은 대부분 시멘트 길이다 보니 표식이 길 바닥 혹은 길 가의 전신주에 있다. 그런데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표식을 찾기가 어렵다 보니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다가도 길을 놓칠세라 항상 시멘트 기둥이나 시멘트 바닥에 신경써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지리산 둘레 길은 올레 길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우선 올레 길만큼 화려하지 않다. 가슴이 확 터지는 오름의 조망도 없고 주상절리 기암절벽에 부서지는 흰 파도도 없다. 그냥 수더분하다. 우리 눈에 익숙한 산하의 모습이 차분하게 들어온다. 올레길이 빼어난 미모의 바닷가 처녀라면 둘레 길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산골처녀라 할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올레길의 풍광에 반한 사람들은 둘레 길이 별 매력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둘레길의 매력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자연스런 길에서 배어 나오는 편안함, 그리고 어릴 적 어머니 치맛자락처럼 포근한 산골 모습들이다.
마을길이 시냇가 둑길로 바뀌다 어느새 논길로, 이어서 고갯길과 산길로, 그러다 다시 오솔길로 바뀌는데 거슬림이 없다. 논둑길에선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숲으로 들어서면 새소리를 듣고 계곡을 건너면서 계곡물 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어느새 이삭이 팬 벼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 동구 밖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서어나무 숲과 정자들, 푸른 솔가지를 힘있게 뻗고 있는 당산나무의 위풍당당한 모습들이 정겹다. 눈에 번쩍 띄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화장기 없는 풋풋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인지 이 길을 손잡고 걷는 젊은 남녀의 미소가 예사롭지 않다. 어쩐지 이들은 결혼할 것 같다. 그렇다. 올레길 분위기는 화려한 처녀와 데이트하는 것 같다면 둘레 길은 부인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걷는 것 같다. 설레임은 없지만 정답다.
둘레 길은 또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길이다. 인월과 운봉을 잇는 구간에는 비전마을과 서림공원이 있다. 비전마을엔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황산대첩비가 있는데 원래의 것은 일제가 깨뜨려 조각난 모습으로 뉘어져 있다.
그런가하면 서림공원에는 이 지방 유지였던 박봉양의 업적비가 한쪽 귀퉁이가 깨져 나간 채 서있다. 박봉양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이 운봉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은 사람이다. 그의 행적을 인정할 수 없는 일부 후세 사람들이 그 비를 깨뜨린 것이다. 비가 세워진 것도 역사요 그 비가 깨진 것도 역사임을 생각하며 걷는데 동편제 창시자인 송홍록의 생가에서 들려오는 박초월의 춘향가가 마음을 뒤흔든다.
둘레 길에도 문제는 있다. 이는 길의 문제가 아니고 길을 걷는 사람의 문제다. 둘레길 주변의 농작물과 열매는 마을 주민의 소중한 재산이므로 절대 손대지 말라고 도처에 안내문이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자꾸 뜯어가고 손대는 바람에 산골마을 사람들의 심기가 편하지 않다.
그래서 벽송사 뒤 옛 빨치산 길을 따라가는 일부 구간은 주민의 반대로 잠정적으로 폐쇄되어 길이 끊겨있는 상태다. 남의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본적인 규범이 지켜지지 않으면 마을과 마을을 이어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제발 몰상식한 행동 좀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올레길과 둘레길은 나름대로 특성이 있다. 서로 우열을 따질 성격이 아니다. 한 쪽은 수려한 미모의 해변 처녀 같고 다른 쪽은 화장기 없이 해맑은 산골 처녀같다. 한 쪽은 가슴 설레는 데이트 분위기이고 다른 쪽은 오랜 애인과 정담을 나누는 분위기다. 그러니 결국 두 곳 다 가는 것이 좋다. 햇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대기가 청명해지는 가을이 되면 걷기가 훨씬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