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금융위기와 잘못된 게임의 법칙

by윤영환 기자
2005.06.07 10:36:32

[edaily] 3년 만기 BBB등급 회사채 발행금리가 4% 초반에 이르렀다. 봇물을 이루고 있는 신용등급 상승러시에 취해 발행기업의 생뚱맞은 신용등급 상승 전망까지도 모두 금리에 미리 반영하는 그런 상황이다. 요즘 시장의 무보증채 금리는 은행의 담보대출금리를 하회한다. 절대로 자연스러울 수 없는 현상이다. 흡사 야구장에서 핸드볼 점수를 보는 기분이다. 투수가 줄줄이 홈런을 얻어맞아 두 자리 수의 점수대가 매일 기록된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좀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더 이상 야구경기가 아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선수들은 의욕을 잃고, 관중들은 더 이상 야구장을 찾지 않을 것이다. 살아 남으려면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 경기장이 문제라면 외야 담장과 마운드를 높여야 하고, 규칙이 문제라면 방망이의 규격을 규제하고 스트라이크 존을 확대해야 한다. ◇ 카드위기의 반면교사 모든 금융위기의 뒤에는 잘못된 게임의 규칙이 있다. 가장 가까운 카드위기만 해도 규칙의 오류를 적어도 열 가지는 열거할 수 있겠다. 그 중에 요즘 상황에서 반면교사가 될만한 것 한 가지만 거론해보자. 바로 머니마켓펀드(MMF)다. 카드위기 이전부터 MMF는 말이 많은 상품이었다. 몇 번이나 위태위태한 고비가 있었지만 제도 개선은 매번 미봉책에 그쳤다.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이다. 명백한 불찰이 확인되지 않는 상태에서 기득권을 가진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안기는 제도변경은 어렵다. 금융위기나 사고가 금융시장 발전의 계기가 되는 이유다. 흔히 카드위기 원인을 카드사의 방만한 경영과 SK글로벌 충격으로 설명하지만 중요한 연결고리가 하나 더 있다. 금융시장 측면에서 보면 카드위기를 촉발한 것은 MMF의 붕괴였다. 카드회사의 방만한 경영은 이미 02년 4분기부터 수습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03년 초에는 연착륙(soft landing)에 대한 기대로 사상 최저수준의 발행금리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것이 불과 한 달 만에 SK글로벌이라는 신용사건에 MMF가 무너지면서 채권환매 ‘쓰나미’를 만난 것이다. 만일 MMF가 ‘냄비’가 아니라 ‘강화된 시스템’이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실제로 장부가 펀드인MMF와는 달리 시가형 펀드는 카드채 환매열풍으로부터 어느 정도 비켜있었다. 조금 양보해서 만일 MMF가 카드위기 직전에 그처럼 급성장하지만 않았더라도 03년 카드위기의 역사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먼저 완만한 성장추세를 유지하던 MMF가 02년 4분기 급성장세로 돌아선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02년 여름까지만 해도 투신사들은 운용할 채권을 구하지 못해 MMF가입을 거절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시장에 채권이 쏟아졌다. 카드채권(CP 포함)이었다. 나중에야 밝혀진 것이지만 은행의 카드채권이 채권시장으로 대거 옮겨 온 것이었다. 당국은 02년 하반기에 두 차례에 걸쳐 동일인여신한도 기준을 강화한다. 카드회사에 대한 은행의 과도한 위험노출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MMF제도개선은 방치하고 은행의 자산 건전화에만 무게를 둠으로써, 오히려 당국이 MMF의 이상비대화를 조장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당국은 카드위기 이후에야 뒤늦게 MMF제도정비에 나선다. 03년 10월 MMF제도개선을 통해 신용등급 기준을 높이고 동일인 자산 편입기준을 강화한다. 사실상 신용위기로부터 상당부분 단절되었다는 판단이다. 만일 이를 02년에만 시행했더라도 02년 4분기의 MMF 이상비대화는 상당부분 제어되었을 것이다. 금융은 사실 돈의 흐름과 제도적 틀(관습 포함), 그리고 이에 대한 지식이 전부다. 시중자금의 흐름에 따라 가격이 만들어진다. 시장의 가격기능이 어떤 이유로 정상 작동하지 않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비극을 막고 싶다면 시장의 가격기능을 방해하는 제도적 취약성부터 손 보아야 한다. 카드위기 직전 은행에서 직접금융시장으로 카드채권이 대거 이동하면서 채권시장에 카드채는 차고 넘쳤다. 그런데 카드채의 시장가격은 오히려 강세를 보였다. 블랙박스 CP와 블랙홀 MMF의 마술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장은 과연 어떤 마술에 걸려있을까? ◇ 리테일 시장 개척시대 03년의 카드위기와 04년의 ‘국지적 신용경색’ 와중에 리테일의 회사채 수요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 실증 자료는 없으나 회사채 유통상황을 감안해서, 리테일 시장규모는 대략 10조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회사채시장 전체로 보면 10% 남짓의 수준이지만, 특정 등급에서는 시장의 절반 이상을 좌우하는 엄청난 규모다. 03년만 해도 한두 개 증권사가 이 시장을 경영했지만 이제는 증권사의 태반이 리테일 시장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신용상황이 안정되고 회사채 시장이 확실히 공급자 우위구조로 돌아서면서 리테일 채권의 성격도 변하고 있다. 한동안 건설관련 PF 등이 공백을 채웠고, 이제는 산업은행 등의 울타리에서나 관리되던 ‘부담스러운 채권’으로까지 수요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간단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회사채 수요기반의 확대, 더욱이 고위험고수익 시장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분명히 고무적이다. 하지만 리테일 시장의 대략 8할 정도가 신용위험 관리체제도 미흡하고 충격 흡수도 어려운 소형 서민금융기관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지금 리테일 시장의 풍경은 금리수준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추가적인 신용위험을 감수하는 인상이다. 지금 이대로 방치하면 머지 않아 크지도 않은 신용사건에 산산이 무너지면서 위기의 발화점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어쩐지 카드위기 직전의 MMF를 다시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시스템 비효율과 도덕적 해이는 무디스(Moody’s)가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두 가지 요소다. 그런데 최근의 우리시장에서는 바로 이것들이 리테일 시장을 키운 성장동력이 되었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역사의 발전 법칙이다. 하지만 시장의 실패에 따른 반사적 성과에 머물면 곧 승자의 재앙에 빠진다. 성공의 착근을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 바로 지금이 기회와 위기의 갈림길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정책의 역할이 긴요하다. 시급히 적절한 감독 및 규제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실태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실태파악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문제의식도 감지하기 어려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 회사채 발행절차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최근의 회사채시장이 극단적인 공급자 우위의 시장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수요확대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설비투자 부진과 투자재원의 내부조달 확대에 원인을 돌린다. 하지만 원인은 그것 만이 아니다. 공급기반의 확대, 다시 말해 새로운 발행자의 참여가 부진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면 기존의 시장이 레드오션이 되었다면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아야 하는데,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회사채시장에 새로이 진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회사채시장은 신참자에게 그다지 녹녹하지 않다. 이때 크게 힘이 되는 것이 바로 주간사의 역할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회사채시장에 ‘주간사는 없다’. 물론 명목상의 주간사는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대표 인수기관일 뿐이다. 인수관련업무 이외에는 사실상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연히 주식발행이나 해외채권발행과 달리 주간사 수수료도 전혀 없다. 주간사는 발행업체에 적절한 상품을 소개하고 재무정책을 자문하며, 투자자를 위한 신용분석 업무를 수행하고, 발행과정에서 자금조달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가격을 조성하고 인수단을 구성한다. 우리 회사채 발행절차에서는 앞쪽의 가치 향상단계는 없고, 그저 주어진 신용등급에 따른 거래만 있을 뿐이다. 농수산시장의 경매 시스템도 이보다는 체계적이다. 과거의 보증채 시장에나 적합했던 약식 발행절차지만 이를 고수하려는 목소리도 있다. 발행기업의 부담확대를 우려하는 것이다. 2주짜리 약식절차가 8주로 길어져서, 기업실사가 실제화되고 기업설명회가 의무화되면서, 주간사가 심부름꾼에서 훈수꾼으로 바뀌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발행기업의 가장 큰 비용은 금융시장의 불신과 변동성이다. 발행절차의 정상화에 따른 신뢰 제고와 변동성 완화는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규 참여자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 예전 회사채시장을 블루오션으로 지켜낸 주인공은 정책부문(policy bank)의 적극적 개입이었다. 2000년 회사채시장 활성화 조치의 근간이다. 그러나 이는 영양부족 상태에서나 적합한 정책이다. 지금의 회사채시장은 영양과잉으로 성인병 징후를 보이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블루오션으로 가는 항로의 희망봉은 발행절차의 정상화다. 또한 그것이 투자은행업무의 활성화를 여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당국은 채권시장 활성화를 위해 채권 발행절차 단순화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같은 방향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회사채시장 활성화를 통해 상대적으로 시장에서 소외되고 있는 우량중소기업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충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당뇨환자에게는 설탕물을 먹이기 보다 조금은 힘들더라도 운동을 시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정책이 아니던가? ◇ 위기 전야의 기시감(Déjà vu)을 넘어서 회사채시장 상황이 03년 초와 너무 흡사하다. 금리가 그렇고 ‘부담스러운 채권’의 이동이 그렇다. 그러나 위기의 방아쇠(trigger)보다는 시장의 비정상적인 긴장(unusual strains)에 더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위기의 재림을 설파하며 호들갑부터 떨 필요는 없다. 우리경제의 성장단계를 감안하면 회사채시장의 미래는 여전히 밝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세 성장의 과정에서도 조심해야 할 국면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눈 앞의 홈런 퍼레이드에 너무 취하지 말고, 더욱 경계하며 새로운 질서 구축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 기업분석부 연구위원/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