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격정’ 쇼스타코비치의 ‘익살’

by경향닷컴 기자
2009.03.13 12:30:00

러시아의 첼로 소나타

[경향닷컴 제공] ‘첼로 소나타’의 역사에 러시아 작곡가의 이름이 확실하게 등재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라흐마니노프가 ‘첼로 소나타 g단조’를 작곡했던 것이 1901년. 이 곡은 러시아 작곡가에 의해 쓰여진 첼로 소나타 중에서 오늘날 가장 빈번히 연주되는 곡이다. 물론 그 전에도 러시아에 첼로 소나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은 1852년에 ‘소나타 D장조’를, 1857년에는 ‘소나타 G장조’를 썼다. 하지만 이 두 곡은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라흐마니노프에 이르러서야 ‘첼로 소나타’라는 장르의 문이 제대로 열렸고, 이어서 미야스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가 자신들의 작품 목록에 첼로 소나타를 올렸다.

라흐마니노프의 ‘g단조 op.19’와 쇼스타코비치의 ‘d단조 op.40’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두 곡의 첼로 소나타로 꼽힌다. 두 사람은 33살 차이. 1873년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조국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망명했고, 1906년 평범한 기술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는 평생을 러시아에 머물며 옛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활약했다. 말하자면 둘은 출신 계급이 달랐으며, 냉전을 주도했던 미국과 소련에서 각자 생애의 후반부를, 혹은 전부를 보냈다.

하지만 그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사뭇 복잡해진다. 라흐마니노프는 주정뱅이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조부 밑에서 어두운 유년을 보냈으며, 망명 후에는 본업인 작곡보다 피아노와 지휘에 매달려야 했다. 작곡보다 연주가 훨씬 ‘환금성’이 컸던 까닭이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피아노를 치며 살아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땠던가?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그는 11살이었다. 스스로 술회했듯, “2월혁명과 10월혁명 등 연이어 터지는 사회적 사건에 관심이 컸던” 가정에서 성장했던 그는, “실생활을 음악에 담고 싶다”는 소망을 어린 시절부터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소박한 미의식은 스무살을 넘어서면서부터 희미해졌다. 그의 미적 감성과 아이디어는 어느덧 모더니즘의 길을 걸었으며, 예술가를 통제했던 스탈린 시대는 당연히 그에게 버거웠다. 그는 권력의 압박이 들어오면 자신의 미의식에 ‘물’을 타며 버텼다. 이를테면 ‘교향곡 5번’이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같은 곡들. 그러다가 압박이 느슨해지면 자신의 내밀한 자의식을 악보 속에 털어놓곤 했다.

33년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로의 이행기를 살았던 두 사람. 라흐마니노프는 혁명 후의 역동적인 조국에 적응할 수 없었던 낭만적 복고주의자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시대의 통제를 ‘물타기’로 버텼던 예민한 모더니스트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극단적인 ‘소심남’이었다. 자기 주장을 세우며 남과 대립하는 걸 피했고 남의 충고나 비난엔 크게 상처받았다.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초연됐던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쇼스타코비치는 “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평생 입에 달고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회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