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에 "내리찍어라" ''살상시위'' 강요한 어른들
by조선일보 기자
2010.02.09 10:44:00
돼지 능지처참… 초등생에 ''허수아비 살상'' 강요
툭하면 화형… 소 피도 뿌려의사 표현, 극렬로 치달아
"민주주의 주요 규범은 자기절제 통한 표현"
[조선일보 제공] 지난 3일 오후 2시 전북 정읍시 연지동 농협중앙회 정읍시지부 앞. 정읍농민단체연합회 등 소속 농민 300여명이 "농협이 조합원을 외면하고 벼 매입가를 40㎏당 4만4000원 이하로 매입키로 담합했다"며 규탄집회를 열었다. 집회 도중 이들은 지역 5개 농협장을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비스듬히 눕혀놓고 곡괭이로 내리찍는 '살상 퍼포먼스'를 했다. 허수아비는 흰 천으로 둘둘 말렸고, 그 위에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색 페인트가 뿌려져 있었다.
오후 4시 30분쯤 학원 수업을 마친 정읍서초등학교 3~4년생 3명이 버스를 기다리며 집회를 구경하던 중 '사태'가 벌어졌다. 시위대들이 이들에게 곡괭이를 주며 "너희들도 한 번 해보라"고 등을 밀었고, 처음엔 거절하던 초등생들도 마지못해 곡괭이로 허수아비를 2~3차례씩 내리찍었다.
이 사실이 지역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지역 교육청과 농민단체에는 "초등학생들에게 살인을 가르치느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한일석 정읍교육장은 "교육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농민단체에 강력히 항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농민단체연합회는 "격앙된 울분을 표현하기 위한 퍼포먼스로 아이들 참여를 의도하지 않았고, 집회가 끝나고 대부분의 농민이 흩어진 뒤 일어난 일"이라며 "어른이 강제하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으나 다음날 학교를 찾아가 사과했고 앞으로는 집회장 주변 정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말했다.
| ▲ 지난 3일 전북 정읍시 연지동 농협중앙회 정읍시지부 앞에서 열린 농민대회에서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원들이 지역 농협조합장 5명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곡괭이로 찍게 하고 있다. / 전북일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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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언론이나 대중 눈길을 끌기 위해 상식에 벗어난 충격·극렬 퍼포먼스를 벌이는 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달 'PD수첩' 광우병 보도 무죄 판결에 항의하는 어버이연합,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며 특정 판사 얼굴을 붙인 상자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벌였고, 어버이연합 등은 작년 9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정문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가묘를 세워놓고 이를 장난감 불도저로 파헤친 '전력(前歷)'도 있다.
작년 11월 행정도시범공주시민대책위원회와 행정도시사수연기군대책위원회는 충남 공주·연기지역 주민 1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공주시 금강둔치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행정도시 백지화 세력을 뜻하는 4m 정도 높이 대형 십자가 3개에 불을 붙이는 화형식을 벌였다. 또 정부·정치권에 항의하는 뜻으로 '행정도시 수정세력' '혁신도시 무산세력' 등 글귀가 달린 꽃상여를 메고 상여행진을 벌였다.
작년 4월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서울모터쇼 행사장 앞에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조합원 40여명이 기자회견을 열어 "모터쇼의 그늘에서 강제휴업, 임금삭감, 대량해고로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이) 죽어가며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한 뒤, 갑자기 "한국 자동차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로 만들어진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겠다"며 준비한 차량에 '선지(소의 피)'를 뿌렸다.
2008년 7월엔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을 규탄한다는 취지로 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HID) 회원들이 일본 국조(國鳥)인 '꿩' 9마리를 둔기로 내리치고 죽은 서너 마리를 대사관 담장 안으로 던졌다. 당시 대부분 시민들은 "취지는 동감하지만 너무 심하다"고 비난했다.
| ▲ 2007년 5월 경기 이천시 주민들이 특수전사령부 이천 이전을 반대하며 서울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도중 새끼 돼지 다리들을 밧줄로 묶은 뒤 잡아당겨 죽이는‘능지처참’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경기일보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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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경기 이천시 주민들로 이뤄진 '군부대 이전반대 이천시 비상대책위원회'는 "송파신도시 개발로 인한 특수전사령부 이천 이전을 반대한다"며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집회 도중 돌연 새끼 돼지 한 마리가 끌려나왔고, 일부 주민들은 돼지를 밧줄로 묶은 뒤 잡아당겨 죽이는 '능지처참'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돼지가 잘 죽지 않자 이들은 칼을 꺼내 '확인 도살'하는 방법으로 '충격 퍼포먼스'를 마쳤다. 이후 시민과 동물보호단체의 비난이 빗발치자 비대위측은 "일부 주민들이 절박한 감정을 호소하려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며 사과했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처럼 집회·시위가 차분히 주장·의견을 알리는 차원을 넘어 과격·탈선으로 치닫는 사례가 많지만 이에 대한 법적인 처벌 규정은 명확하지 않다. 경찰은 "퍼포먼스에 사용한 물품이 신고하지 않은 것이거나 폭력 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 도구라면 압수할 수 있으며,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줬다면 경범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산 민주노총 '선지 피 시위'의 경우처럼 충격 퍼포먼스 행위자들은 경범죄로 입건되더라도 대부분 훈방으로 풀려나고 있다.
그래서 성숙한 사회의식을 통해 시위 주체들이 이를 스스로 통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서울대 박효종 교수(윤리교육과)는 "표현의 자유는 공개된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민주주의의 주요 규범은 자기 절제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균관대 성재호 교수(법학과)는 "자기 의견을 표현할 때 남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는 교육을 일찍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