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40년 산파' SVB 파산…스타트업 연쇄도산 위기

by김정남 기자
2023.03.12 14:33:33

'뱅크런 위기' SVB, 이틀 만에 파산 충격
돈 묶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줄도산 공포
월가서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 우려 확산

[뉴욕·실리콘밸리=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김혜미 기자] 지난 10일 오후 4시(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파산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은행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건물 내부 로비 안은 텔레비전 영상만 켜져 있었다. SVB가 유동성 위기설이 불거진 이후 이틀 만에 파산하면서 관심이 높아진 영향 때문인듯 서너명의 기자들만 서성이고 있었다. 혹시나 은행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다려 봤지만, 은행 근처는 적막감만 감돌았다.

지난 10일 오후 4시(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정문 앞에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사진=김혜미 기자)


‘실리콘밸리 산파’ SVB의 파산 충격파가 심상치 않다. 업력 40년(1983년 설립)에 총자산 2090억달러(약 277조원)의 SVB가 순식간에 파산하면서 스타트업 생태계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더 나아가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을 견디지 못하고 금융권이 줄도산하는 시스템 리스크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다. 월가 일각에서는 바이든 정부가 초기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SVB 붕괴 과정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았다. 유동성 위기설이 수면 위로 오른 것은 지난 8일 오후. 고객들의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고자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팔 의도로 매수한 주식·채권)을 모두 팔면서 18억달러 손실을 냈고, 이를 메우고자 22억5000만달러 규모의 증자(자본금 증가를 위한 신주 발행) 계획을 발표하면서다. 연방준비제도(Fed)의 역대급 긴축으로 AFS 대부분인 미국 국채가격이 급락(국채금리 급등)하면서 매입가보다 저렴하게 팔았고, 그 때문에 대규모 손실을 낸 것이다. 손해를 보고서라도 현금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뱅크런 압박이 컸던 셈이다.

사태가 악화한 것은 그 다음 날인 9일이다. SVB에 예금을 맡겨둔 다수 스타트업들이 벤처캐피털(VC)들의 연락을 받고 예금 인출에 몰리면서 급기야 돈을 찾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그날 SVB 주가는 60.41% 폭락했다. 실리콘밸리는 말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그 와중에 SVB는 증자에 실패했고, 매각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SVB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SVB 폐쇄 조치를 내리면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receiver)으로 임명했고, FDIC는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eposit Insurance National Bank of Santa Clara)을 새로 설립하며 SVB의 모든 자산과 예금을 이전시켰다.



SVB는 40년간 실리콘밸리의 산파 역할을 한 곳이다. 미국 내 자산 16위 은행이다. 지난해 말 기준 총예금은 1754억달러에 이른다. 이 정도로 큰 금융기관이 이틀이 채 안 돼 파산한 것 자체가 충격적이라는 평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붕괴한 JP모건체이스의 워싱턴뮤추얼(총자산 3070억달러) 이후 두 번째로 큰 파산 규모다.

SVB는 FDIC의 감독 아래 오는 13일부터 예금보험 한도(25만달러) 이내 금액에 대해서는 인출할 수 있도록문을 연다. 하지만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전체 예금 중 93% 이상이 예금보험 한도를 넘는 금액이다. SVB는 미국 테크·헬스케어 벤처기업 중 44%를 고객으로 두고 있다. 예금의 상당 부분이 이 스타트업들의 운영자금으로, 업체들은 갑자기 돈이 묶이게 된다. VC를 통해 급전을 빌리거나 또 다른 은행에서 신용 대출을 받는 방안 외에는 현금 조달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스타트업 줄도산 공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지난 10일 오후 4시(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내부에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사진=김혜미 기자)


주목할 것은 이번 사태가 실리콘밸리 생태계에 국한할지, 아니면 미국 금융권 전체로 번질 지다. 월가와 학계는 일단 금융 시스템 리스크를 촉발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 일부 특수은행의 위기라는 얘기다.

전 미국 재무장관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블룸버그에 나와 “다음주 급여일을 맞추기 위해 예금을 사용하려 했던 스타트업이 수백개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개는 될 것”이라며 “미국 혁신 시스템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번 사태가 광범위한 금융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이어진 금융권 붕괴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세실리아 라우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브리핑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한 스트레스 테스트 등으로 당국은 은행권 시스템의 회복력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일부에서는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1년간 공격 긴축 탓에 금융 환경이 급변하면서 파악 불가능한 불확실성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공포감이다.

정부가 조기에 개입해 불안 심리를 잠재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미 나오기 시작했다. 벤처 투자가 데이비드 삭스는 트위터를 통해 “파월과 옐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며 “모든 예금은 안전할 것이라고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CNBC는 전했다. 그는 “톱4 은행에 SVB 예금을 분산해야 한다”며 “13일 전에 이것을 하지 않으면 위기는 확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억만장자 투자자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캐피털 최고경영자(CEO)는 “정부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바로잡을 시간은 48시간밖에 없다”며 “JP모건체이스,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이 13일 증시 개장 전 SVB를 인수하지 않거나 혹은 SVB 예금 전체를 정부가 보증하지 않는다면 보호가 안 되는 모든 예금을 인출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