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믿는 도끼의 역설

by윤영환 기자
2007.11.21 10:09:04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모르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는 어떤 것 때문이다.” What gets us into trouble is not what we don’t know. It’s what we know for sure that just ain’t so.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고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발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객관적으로는 ‘믿는 도끼’가 ‘아닌 밤중의 홍두깨’보다 훨씬 안전하다. 그래도 믿는 도끼에 더 자주, 더 크게 사고를 당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믿었고, 또 그래서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홍두깨가 아니라, 믿는 도끼를 들고 또다시 산에 올라야 한다. 아무리 믿는 도끼라도 반드시 안전수칙을 지키고 항상 신중하게 다루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사고의 아픔과 교훈을 잊는다. 그리고 규제 완화를 명분으로 너무 쉽게 안전 기준을 완화한다.

당국은 소위 ‘잘 알려진 기업(WKSI; Well-Known Seasoned Issuer)’에 대한 공시의무 완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미 알게 모르게 많은 항목이 자율 공시라는 미명하에 공시 목록에서 사라졌고, 더 많은 목록의 삭제가 검토되고 있다. 각종 기업단체의 공시의무 완화 요구는 무척이나 집요하지만, 투자자나 언론은 투자자 권리 보호에 대해 도무지 무관심하다. 그저 힘 없는 크레딧 애널리스트만 애를 태운다.

WKSI의 원래 의미를 짚어보면 ‘잘 알려진 기업’보다는 ‘잘 알려지고 성숙한 기업’이 보다 정확한 개념이다. 그러면 ‘성숙한’은 어떤 의미이고, 그런 기업이 우리 시장에는 얼마나 될까?

미국 SEC의 개념 정의를 살펴보면 WKSI는 주식 유통과 유가증권 발행 등 거래 규모로 사실상 결정된다. 하지만 미국의 유가증권(특히 회사채) 발행 절차는 우리보다 훨씬 길고, 또 투자자 지향적이다. 반면 우리의 발행 절차는 훨씬 짧고, 투자자의 개입보다는 공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의 기준을 우리 시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성숙한 기업이라면 투자자와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야 한다. 회사채를 발행하면서 기업설명회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투자자는 물론 신용평가사조차도 자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성숙한 기업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거래 규모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공시까지 완화하면 투자자는 설 자리가 없다. 눈 감고 도끼질을 해야 한다면, 누가 선뜻 도끼를 잡겠는가? 공시 의무 완화보다 투자자와의 관계 성숙이 우선 과제이고, 적어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미국 SEC는 2005년 12월 WKSI에게 ‘자동 일괄등록(Automatic shelf registration)’을 허용했다. 공시 요건 완화가 아니라, 단지 등록제도를 사실상의 신고제도로 바꿔서 절차의 번거로움과 비용부담을 줄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괄신고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발행업무의 편의성과 발행분담금 할인 혜택 등에서 상당히 유용하다. 다만 사정의 변경이 있을 때 자칫 불성실 공시가 될 수 있어 탄력적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공시 내용의 축소가 아니라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의 제도 개선이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동시에 미국 SEC는 WKSI에게 ‘자유형식의 공모 안내 자료(FWP; Free Writing Prospectus)’의 등록을 허용했다. 이것도 역시 제도적 양식의 요건을 모두 포함해야 하므로 정보 제공 목록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투자자에 대한 설득력 강화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조치다. 하지만 제도 개선의 배경에는 소송도 불사하는 투자자 권익 보호 문화 때문에 형식 규제를 완화해도 발행기업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우리가 모방하기는 아직 쉽지않은 이유다.

선진국이 도입했고, 또 취지가 그럴싸하다고 모두가 우리에게 좋은 정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시장의 발전 단계나 투자 문화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는 법이다. 공정공시제도가 기업의 투명성 제고보다는 정보 제공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더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물론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 못지않게, 기업의 영업 비밀을 보호하고 재무 활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그 접점은 당시의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금융시장의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에 바탕을 둔 개선 의지와 균형 감각이다.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