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만 부려놓고 열차는 떠났다 ‘과거 속으로’

by경향닷컴 기자
2009.12.30 11:49:00

흑백사진속 풍경같은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경향닷컴 제공] 한국은 재개발공화국이다. 웬만한 도시에선 불과 한 세대 전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삼국시대에 세운 절이나 조선의 궁궐, 경상도의 사대부 고택은 남아 있지만 50년 전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도시의 모습은 대부분 지워졌다.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고를 끊임없이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재개발은 미덕이었고, 일부에겐 재테크였다. 고쳐 짓는 것보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돈이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집도, 조상 대대로 묵었던 마을도 쉽게 지워버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잠시 기억력을 잃은 사람처럼 한국의 주요 도시엔 한 세대 전의 모습이 없다. 흑백 앨범엔 분명하게도 그 시절 그 모습이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해서 사진기를 둘러멘 요즘 젊은이들이 서울의 낙산길이나 부산 문현동,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찾곤 한다. 벽화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의 집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에 간 것도 과거를 보고 싶어서다. 철길마을은 한 두 세대 전의 모습을 보여주던 앨범이다. 386세대가 1960년대 들었던 ‘기찻길옆 오막살이’란 동요가 생각나는 그런 마을이었다. 거기도 사진기 멘 젊은이들이 몰려오는 곳이다.

철로 바로 옆에는 집들이 붙어있다. 철길 옆에 슬리퍼가 나란히 놓여있거나 보조바퀴가 달린 어린이 자전거가 세워져있는 집도 있었다. 가마솥이 걸린 폐가도 보였고,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다.

일단 군산이란 도시에 대해 먼저 알아두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군산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철저하게 한국의 물자를 수탈해간 항구다. 김제 만경 평야의 너른 들판에서 가져온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군산은 금강 하구에서 이어지는 강경 뱃길의 들머리로 1899년 개항한 해상교통의 요충지다. 1910년대 군산은 ‘작은 일본’이었다. 군산 주민의 절반인 약 8000명이 일본인이었을 정도다. 해서 군산에 가면 가끔 일본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나고 자란 집들인 적산가옥, 그들이 다녔던 절 동국사를 찾아 오는 것이다. 군산은 일제가 패망한 뒤 그리 많이 변치는 않아서 조선은행, 나가사키18은행 등 근대문화유산이 많다.

경암동 철길마을은 일제 때 조성됐다. 63년 전부터 살았다는 ㅇ씨는 “여기가 원래 갯벌이었다”고 했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싫다는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거의 없다”며 아득한 옛날 얘기를 꺼냈다.
 

일제가 간척사업을 벌인 것은 이 일대에 방직공장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단다. 군산역에서 방직공장 부지까지 2.5㎞ 구간에 철길을 놓았다. 방직공장 대신에 북선제지가 들어섰다. 해방 후에는 고려제지에 이어 세풍제지 등 종이회사가 차례로 공장을 차지했다. 현재는 페이퍼코리아가 들어서 있다. 종이회사의 원자재를 실어나르던 철도였으니 ‘제지선’ 또는 ‘종이철도’라고 불렸다.

가난했던 시절, 갯벌을 메운 땅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팔도에서 온 사람들이 철로변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의 시초였다. 지금은 마을 뒤로 아파트도 보이고, 대로 건너편에는 대형할인매장 이마트도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집은 하나 둘씩 늘어갔고, 기차가 겨우 다닐 만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빼곡히 마을이 들어섰다. 열차와 마을이 공생하는 철길마을은 그렇게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집들이 조금 나아진 것은 박정희때였어. 우리가 새마을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집을 새로 짓게 해줬지. 그래서 수도도 전기도 들어오고, 집도 새로 지을 수 있었어.”



원래는 국유지라 집을 짓는 것은 어려운데 7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 때 묵인을 해줬다는 것이다. 당시엔 가마니로 움막을 만들어 사는 사람도 있었단다. 어쨌든 마을 사람들은 토지점유의 대가로 세금을 내고 있다. 현재는 33가구가 살고 있다. 80년대 중반 땅 일부는 불하했지만 철길마을은 철도부지로 묶였다. 그나저나 열차가 다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열차는 2008년 6월까지 하루 두 번 다녔다고 한다. 이후 지난해 말까지 부정기적으로 다니다가 지금은 열차운행은 중단됐다.

마을 사람들은 열차가 다닐 때면 법석을 떨었다. 아침엔 원료를 싣고 제지회사로 들어가는 열차가 다녔고, 오후에는 종이 완제품이 실려 나왔다. 철로변에 물건을 두면 박살이 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늘 조심해야 했다. 마치 쓰레기수거차에 환경미화원들이 매달려 가는 것처럼 열차에도 안전요원들이 매달린 채 철길에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경적을 울리고 주의를 줬다. 요즘 지어놓은 지하철 역사도 열차가 달릴 땐 진동을 느끼는데 철길 마을은 양은냄비와 찬그릇은 물론 솥단지까지 흔들거렸을 게 분명하다. 마을 주민 중 하나는 여닫이 문이 드물다고 했다. 열차에 받히면 문짝이 날아가서 미닫이가 많단다.

철길마을이 알려지면서 몇 해 전부터 사진작가 등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그닥 이들이 달갑잖은 눈치다. ㅇ씨는 “만날 허름하고 지저분한 것만 찍어대니까 마을 사람들이 좋아허겄어, 사람들도 막 찍어대니까 당연히 불편하다”고 떨떠름해 했다. 사진쟁이들이 오면 마을사람들은 슬금슬금 숨는단다. 한 5년 정도 마을에 살았다는 책방 주인은 “이왕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니 체계적으로 관광명소로 만들면 좋겠다.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된 것 같다. 철길도 깨끗하게 단장해 놓으면 좋은데 기차가 안다니니까 집도 늘린다”고 했다. 군산시 문화관광과는 과거 철길마을을 놓고 관광지 논의를 하긴 했지만 지금은 어떤 대책도 없다고 했다. 낚시점에서 만난 40대 남성은 “언젠가 재개발이 되긴 될 거요. 이천몇년쯤에 공원 만든다고 하던데…”라고 얼버무렸다.

경암동 철길마을을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긴 쇠락한 50년대 60년대의 표정, 아니면 70년대 서울역 뒤편의 어느 허름한 주택가라고 해도 믿을 만한 그런 모습이 남아있다. 컬러TV 시대에 태어나 도회지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이 이 철길마을을 찾는 것은 바로 흑백사진 같은 묘한 정취가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공화국이 채 지워버리지 못한 그런 우리들의 얼굴 말이다.



*서해안고속도로 군산IC에서 빠진다. 내비게이션에서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을 치면 안나온다. 군산 이마트를 쳐야 한다. 이마트 앞 왕복 6차선 건너편 도로변 상가 뒤가 경암동 철길마을이다. 도로변에서 보면 철길은 안보인다. 상가 사잇길로 들어서봐야 철길마을의 모습이 나타난다.

*군산은 근대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쌀을 저장해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장미동에는 옛 군산세관이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군산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나오자마자 만나는 군산 관광안내소에 가면 군산 근대문화유산 지도가 있다. 군산 근대문화유산으로 꼭 봐야 할 것은 나가사키18은행,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일제가 뚫은 해망굴은 꼭 보면 좋다. 군산 하구언은 철새도래지로 철새전망대도 있다.

*군산시 중앙로에 있는 이성당(063-445-2772)의 포장지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란 글귀가 있다.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하던 빵집을 해방 직후 인수받아 운영하고 있단다. 옛 조선은행 앞 빈해원(063-445-2429)이란 중국집은 50년 이상된 중국집이다. 군산 토박이들은 요즘 미원동의 복성루(063-445-8412)도 많이 찾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