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의철 기자
2008.07.11 10:43:00
이학수 김인주 "내게 책임 물어달라"
사회적 경제적 이슈의 총합..16일 선고
[이데일리 이의철논설위원] 비록 전날 밤을 새우진 않았겠지만, 이 전회장이 밤새워 고민해 작성한 최후진술에선 진정성이 느껴진 게 사실이다.
또 다른 비서실 임원 출신 B씨의 증언. “이 회장은 대화를 해 보면 대단히 좋은 취지의 말씀을 하신다. 이상주의자다. 그래서 한편으론 순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황인식이 나이브하다고 할까.” 맞다. 이 전회장의 최후진술에선 이상주의자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이상주의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돈이 많으면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돈 많은 이상주의자라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이 표현은 현 정부 들어서 약간 왜곡됐지만, 그래도 가장 적당한 표현인 듯 싶다) 그런데 세상을 바꾼, 이 돈 많은 이상주의자는, 왜 법정에까지 서게 됐을까.
그의 최후 진술을 들으면서 문득 ‘칼레파 타 칼라(좋은 일은 실현되기 힘들다)’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삼성으로서도, 이건희 회장으로서도 칼레파 타 칼라지만,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참여연대나 심지어 김용철 변호사 입장에서도 세상은 ‘칼레파 타 칼라’다.
이어지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은 “비서실장을 역임한 사람으로써 회한이 많다. 재판과정에서 많은 반성했고 앞으로 살면서 교훈이 될 것 같다. 선처바란다”는 요지로 말했다.
이학수 피고인은 최후진술을 하면서 감정이 북받치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희 회장께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이 제가 잘 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 보필했더라면 이런 어려움 겪지 않으셨을 것이다. 죄송하고 참담하다. 회장께서는 항상 인재양성과 기술개발을 강조하셨다. 늘 사람의 중요성을 역설하시고 사람을 뽑고 기르는 데 온 힘을 다 쏟으셨다. 경영의 세세한 부분은 믿고 맡기셨다. 만약 이건희 회장 같은 분이 없었다면 세계적 기업 삼성은 없었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이 회장 같은 생각과 집념을 가진 경영자를 만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회장께선 건강이 무척 좋지 않다. 폐암은 기적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재판과정에서도 폐에 물이 차 고생하셨다. 회장께서는 다 버리시고 삼성을 떠났다. 회장에 대해선 선처 부탁드린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
이어지는 김인주 피고인의 진술. “많은 반성과 후회를 하고 있다. 이 사건 전반의 실무책임자로서 당시 좀 더 신중히 일을 처리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있다. 내가 잘못해서 회장이 법정에 서고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 야기한 데 대해 죄송스럽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내게 책임을 물어주시고 윗분들과 동료들에게는 관대한 처분을 내려달라”
이 전회장에 이어 최후진술한 이학수 전실장과 김인주 전사장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모두 내 잘못이다. 윗분들은 선처해달라”고 얘기하는 것은 어쨌든 보기에 좋았다. 위기상황에서 “나는 책임없다”며 꽁무니를 빼는 인간들이 세상엔 의외로 많다. 이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유석렬 김홍기 최광해 피고인들도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 부족한 점이 많아 물의를 일으킨 점 사과한다. 관대한 처분 부탁드린다”는 요지로 진술을 마쳤다.
최후진술을 들으면서 문득 떠오른 단상 하나.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의 핵심 혐의에 대해 무죄취지로 변론을 했는데,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반성과 후회를 한다고 하니 그렇다면 유죄를 인정하는 것인가?
이 전회장은 이번 재판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것은 기자도 마찬가지다. 특검과 변호인단의 사건 규정에서 알 수 있듯 삼성재판은 사회적 경제적 여러 가지 이슈들을 함축하고 있다. 단일 기업의 사례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유례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당사자가 아닌 법학교수들이 사적 기업의 내부행위를 고발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법리적으로 소극적 손해와 적극적 손해를 각각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에서부터 배임죄와 재산죄가 과연 성립하는가 여부, 이 사건이 도덕적인 비난의 문제인가 아니면 죄형법정주의 내에서 법률적으로 단죄받을 수 있는 사안이냐에 이르기까지. 또 사회적으로도 총괄책임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재벌총수들의 경제기여도가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이것이 양형상 정상참작의 이유가 되는지도 궁금하다.
어쨌든 ‘2008 고합 366’사건의 1심 절차는 모두 끝났다. 선고 공판은 16일 오후 1시 30분. 누가 이기고 지느냐를 떠나서 10년 이상 끌어온 삼성의 편법 상속과 그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이 어떤 식으로든 일단락되는 날이다.
재판부는 선고를 통해 이 모든 이슈에 대해 답할 것이다. 기록하는 기자 입장에선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그것에만 갇혀있을 수는 없다. 그것 역시 또 다른 무책임 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