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택의 국경은 없다] ⑪ 지친 무소처럼 은수가 왔다
by트립in팀 기자
2018.06.17 13:42:36
[이데일리 트립in 임택 여행작가]페루의 수도 ‘리마’. 은수가 ‘까야오, Callao 항구’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50여 일간의 긴 항해를 마친 은수는 지친 모습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것이다. 은수는 E-County라는 기종의 소형 버스여서 애초에 컨테이너에 실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은수의 키가 문제가 되었다. 가장 큰 컨테이너 보다 겨우 17티 정도가 더 컸다. 대부분 화물선은 컨테이너 전용선들이어서 페루를 오가는 배들이 많았다. 컨테이너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들은 소위 ‘벌크선’이라는 배에 실어야 한다. 이 배는 컨테이너선에 비교해 운송비도 비쌌지만, 부정기선이라 싣고 갈 화물이 다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은수의 높이를 낮추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퀴의 바람을 최대한 빼 보았다. 7센티를 줄일 수 있었다. 지붕의 환기통과 순환 팬을 떼어내니 5센티가 줄었다. 그래도 약 4센티를 줄일 수 없었다.
벌크 선은 배달지와 선적지가 각기 달라서 여러 나라와 항구를 돌아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태평양의 거친 파도와 바람을 맞으며 왔을 은수와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은수를 만나는 일은 며칠 뒤로 미루어져야 했다. 세관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까야오 항을 통해 들어온 여행 목적의 한국 버스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을 처리하는 메뉴가 없었다. 스페인어를 못 하는 우리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통관사를 찾아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서류를 담당한 일행이 어찌나 꼼꼼하게 챙겨 왔는지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아침 일찍 항구의 세관을 찾아 서류등록을 해야 했다. 통관사들은 여러 가지의 서류에 사인하게 했다.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니 시키는 대로 사인을 해야 했다. 아예 내용을 모르니 답답함도 없었다. 한 건의 서류를 처리하느라 몇 시간이 걸렸다. 어찌나 일이 느린지 이들의 조상은 굼벵이일지도 모른다.
남미에 사는 우리 도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냐나(Maana)랍니다. 무슨 일을 맡기고 언제까지 되느냐고 물으면 꼭 ‘마냐나’ 이러는 겁니다. 다음 날 가면 또 ‘마냐나’ 이러는 거예요.”
마니아나란 우리말로 ‘내일’이라는 뜻이란다.
“처음엔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결국 자동차 고치는 데 4개월 걸렸답니다.”
남미 사람들의 느긋한 성품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는 게 아니라 답답해서 죽는다니까요? 하하하”
이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다. 서류 몇 개 만드는 데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에는 아예 사무실에서 온종일 대기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아는 공무원이 나오지 않았다는 해괴한 이유에서였다. 다음 날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며칠이 또 지나갔다. 결국 일주일이 지나서 모든 서류작업이 끝났다.
은수를 찾는 것은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보세창고였다. 창고에서의 절차도 빠르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인수 작업은 오후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남미를 경험하는 중이다. 우리의 예상은 늘 빗나갔고 그 폭은 매우 컸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어둠을 뚫고 드디어 은수가 나타났다. 큰 철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모습이 창고 모퉁이에 서 있었다. 은수였다. 전조등을 켠 은수는 힘찬 시동소리를 내며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직원은 나를 들어오라고 하더니 서류에 사인하라고 했다. 이제 은수가 내 품에 들어왔다. 그 먼 길을 온자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그 길고 많은 날의 외로움은 어떻게 떨쳤을까. 내가 도착 한지 무려 13일 만에 우리는 이렇게 극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은수에게 큰일 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졌다. 은수 안에 설치해 놓았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먼저 비싼 돈을 들여 장착한 인버터(Inverter)가 사라졌다. 인버터란 차량에서 배터리의 전류를 220V로 전환해 주는 장치다. 이 장치가 없으면 전기제품을 사용할 수 없다. 전기밥솥이나 프라이팬, 포트와 같은 가정용 전기제품의 사용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게다가 블랙박스도 사라졌다. 함께 실어 놓았던 그릇과 캠핑 용구들이 무사한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는 도둑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보니까 차 안에 실어 놓은 물건을 선원들이 다 훔쳐 간다지 뭐야?”
사람들은 모두 도둑을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인버터를
떼어내면서 잘라 놓은 전선을 전기 테이프로 잘 감아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능숙한 솜씨로 감아 놓아 합선을 방지하도록 했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면서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 놓았다니 이상한 일이야.’
우리는 일단 도둑을 맞은 것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일은 도둑을 맞은 것이 아니라 세관에 압수당했다는 강한 의심을 품게 됐다. 우리는 버스를 배에 실어 보내며 품목 난에 인버터와 블랙박스를 기재하지 않았다. 세관은 당연히 품목리스트에 없는 물건은 ‘밀반입’으로 분류했을 것이고 압수는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둑이 이토록 정성껏 피해자의 안전을 고려해 테이프 작업을 했겠는가. 오해는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압수한 것이었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다시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이 사실은 은수를 과테말라에서 미국으로 배로 보내며 알게 되었다.
은수가 도착하였다고 바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보낸 장비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은수는 현대자동차의 리마 정비소에 입고되었다.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오느라 상해진 차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4개이던 의자를 6개로 늘렸다. 캐나다에서 온 이라는 교포 청년과 박우물씨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녁마다 3개월간 남미여행에 대한 계획과 각자의 역할을 짰다. 원래 태평양을 따라 칠레와 아르헨티나로 간 다음 브라질을 거처 북상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우기가 닥칠 거라는 박우물씨의 의견에 따라 일정이 거꾸로 뒤집혔다. 우기의 자동차 여행은 불확실성이 높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회계를 정했다. 나는 애초부터 회계는 없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언뜻 회계가 없으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또한 누군가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아주 오래전 여행에서 얻은 경험이다. 20여 년 전 파키스탄을 여행한 적이 있다. 파키스탄의 북부지방을 유럽에서 온 4명과 함께 한 달간 여행했다. 네덜란드인 커플 두 명과 영국 뉴캐슬에서 왔다는 중년 아저씨였다. 늘 함께 이동했고 같이 밥을 먹었지만, 공동경비를 걷은 적이 없다. 우리는 비용이 발생할 때마다 각자에게 분담된 돈을 거뒀다. 철저한 1/n 더치페이다. 이러다 보니 모든 회계는 개인의 일이 되었다. 잔돈도 늘 개인이 챙겨야 했다. 식사하면 자유롭게 자신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골랐다. 자신의 음식값은 빈 접시에 올려놓으면 그만이었다. 비용을 사용하면서 누군가가 수고해야 하는 일이 사라졌다.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니 회계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했다. 반대의견을 낼 기회가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에 따랐다. 회계는 매일 저녁 결산을 한 후 각자의 휴대폰을 통해 알렸다. 회계를 맡은 그는 저녁이면 회계를 하느라 끙끙거렸다. 나는 웃음이 났다.
“J야, 나한테는 회계보고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돈 걷을 때만 얘기해.”
하지만 그는 계속 결산서를 보냈다. 이 회계는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중단했다.
페루에 온 지 2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회계가 몸이 아파 저녁 식사를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오느라 고산증이 심했다. 그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
“형님, 저녁 드시고 영수증 좀 챙겨다 주세요.”
알았어. 뭐 햄버거라도 사다 줄까?”
“아뇨, 못 먹을 것 같아요.”
결국 그는 식사하지 못했고 나는 영수증을 챙겨다 주었다. 이런 경우도 밥값은 1/n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함이 자라고 있었다.
“오늘부터 회계는 각자 하십시오. 드시고 싶은 것 드시고 마시고 싶은 것 마음대로 드십시오. 그리고 돈은 현장에서 각자가 내시기 바랍니다.”
이날로 회계가 사라졌고 그는 해방됐다. 여행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야 한다. ‘먼 길을 가는 자는 눈썹도 뽑고 가라’지 않았던가. 여행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2014년 12월 17일 아침.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며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허세를 부리며 마음속의 두려움을 감추려 애썼다. 우리는 어디를 가는 줄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