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눈에만 담기엔 너무 아까우니깐…낙원을 달리다

by강경록 기자
2025.03.14 06:00:00

마리아나 사이판 구석구석 누리는 '런투어'
8일 ‘2025년 사이판 마라톤 대회’ 성료
600여명 참가자 중 210여명 한국인 러너
가라판 아메리칸 메모리얼 파크 원점 회귀
배우 유이와 가수 션도 10㎞ 참가해 완주

[사이판(북마리아나)=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아직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새벽 6시. 사이판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푸른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며 대지를 깨우고 싱그러운 남국의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가슴을 설레게 한다. 시원한 새벽 공기가 피부를 스친다. 몸을 가르는 공기 속에서 출발선에 선다. 심장은 점점 빠르게 고동치고 다리는 미세한 떨림 속에서도 결의를 다진다. 출발 총성이 울리는 순간, 몸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어진다. 군중의 함성이 귀를 울리고 드디어 마라톤 레이스가 시작됐다.

사이판마라톤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마이크로비치의 풍경
북마리아나제도의 수도인 사이판. 이곳에서는 매년 특별한 레이스가 펼쳐진다.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여행의 한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사이판 마라톤’이다. 지난 8일 가라판의 아메리칸 메모리얼 파크를 출발점으로 삼아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는 이 대회는 벌써 17회를 맞이했다. 올해도 전 세계에서 온 러너들이 사이판의 자연을 두 발로 만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들은 풀(42.195㎞), 하프(21㎞), 10㎞, 5㎞로 나눈 코스를 각자 실력에 맞춰 고른 뒤 사이판이 내어준 ‘낙원의 레이스’를 만끽했다.

초반의 달리기는 가볍다. 신발이 도로를 박차는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을 만든다. 주변 러너들과 나란히 호흡하며 길가의 응원 소리에 미소 짓는다. 이 순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유로움이 몰려온다. 물론 이 행복한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근육이 서서히 뻣뻣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피로가 서서히 몸을 잠식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몇 번의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한 발을 내디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동이 트자 붉은 태양이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른다. 따스한 햇살이 등에 닿지만 온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꾸준히 내디디지만 다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심장은 가슴을 뚫고 나올 듯 뛰고 정신이 흐려진다. 이 순간이야말로 마라톤의 정수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한계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시간이다. 발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누르며 단 1m라도 더 앞으로 나아간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단 하나의 목소리. “할 수 있다. 넌 여기까지 왔다.”

사이판 마라톤 참가자 이혜영씨


올해 사이판 마라톤 대회에는 600여 명의 러너가 참가했다. 그중 한국인 참가자는 210여 명. 전체 참가자의 약 3분의 1에 달할 정도로 한국인 러너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10㎞ 경쟁 부문 여성부 참가자인 이혜영(59) 씨의 기록은 58분 26초. 그는 “대회 참가를 위해 주 3~4회씩 5㎞에서 10㎞를 달리고 가끔 장거리 훈련도 했다”며 “국내 마라톤 대회는 참가자가 너무 많아 주변 경치를 즐기기 어려운데 반해 사이판은 드넓은 환경에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어 좋았다”는 소감을 전했다.



가수이자 마라토너인 션이 10km 완주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마리아나관광청)
이번 대회에는 마라톤 애호가로 알려진 가수 션도 참가해 특별한 경험을 나눴다. 이랜드파크 해외 호텔·리조트 법인 ‘마이크로네시아 리조트’(MRI)의 초대를 받아 이번 대회에 참가한 그는 “일정상 대회 하루 전 도착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대회에 참여했지만 다음에는 더 일찍 도착해 최상의 컨디션으로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이어 “마라톤을 하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던 점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마리아나관광청은 사이판 마라톤을 포함해 스포츠 관광 활성화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사이판이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스포츠와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라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올해부터는 ‘디스 이즈 더 마리아나스’(This is The Marianas)라는 마케팅 캠페인을 통해 스포츠 투어리즘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한국인 스포츠·여행 애호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배우 유이를 마라톤 홍보대사로 임명하고 골프 홍보대사로는 박보겸 프로를 선정했다. 유이는 이번 사이판 마라톤 대회에서 가수 션과 함께 10㎞ 코스를 완주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사이판 마라톤의 가장 큰 매력은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서태평양의 대자연을 만끽하며 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바닷바람, 주변을 둘러싼 푸른 열대우림,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풍경이 주는 감동까지 있다. 특히 해변 도로를 달리며 마주하는 일출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러너들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경이로운 순간을 만끽했다.

사이판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러너들이 완주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사진=마리아나관광청)
마침내 저 멀리 결승선이 보인다. 환희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며 속도를 끌어올린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듯 아프지만 이 순간은 고통이 아닌 자유다. 함성이 커지고 결승선이 눈앞에 다가온다. 두 팔을 번쩍 들며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숨을 몰아쉬며 허공을 바라본다. 근육은 녹아내릴 듯하지만 가슴 속에는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마라톤은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한계를 넘는 과정이다.

마라톤을 완주한 러너들의 얼굴엔 피곤함보다 성취감과 행복이 가득하다. 푸른 바다와 드넓은 하늘, 그리고 자연이 선물하는 감동이 함께했기에 가능한 순간이다. 사이판에서의 러닝은 단순한 달리기를 넘어 자연과 하나가 돼 여행을 즐기는 특별한 경험이다.

사이판 마라톤 완주 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