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책 위를 걷는다 이야기가 길이 된다

by조선일보 기자
2009.05.07 11:45:00

함께 걸어요 ''워킹 토킹''―소설가 성석제와 ''상주''를 가다

[조선일보 제공] "고향 상주는…저한테는 잉크통 같다고나 할까요. 저는 펜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걸 어쩔 수 없이 쓰는 거죠." 소설가 성석제(49)씨는 열네살 봄 서울로 이사하며 두고 떠난 고향을 '존재의 아주 밑바닥'이라고 설명했다. '봄비가 내려 백곡(百穀)을 윤택하게 한다'는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穀雨·4월 20일)답게 성씨가 '어린 시절 셀 수 없이 걸어 다녔던 길'에도 비는 부드럽고 고르게 종일 뿌렸다. 18명 '워킹 토킹' 참가자들은 "오늘 내린 비는 아주 이로운 비"라는 성씨의 설명에 "언제 빗속을 걸어보겠느냐"면서 웃으며 비옷을 걸쳤다.

상주시 만산동 임란북천전적지에서 북천(北川) 따라 걷다 자전거박물관 지나 노악산 중턱 남장사에 닿는 길 곳곳엔 '성석제 소설'의 발자국이 은근히 찍혀 있었다. 성씨의 설명이 없으면 휙 지나치고 말았을 바위, 개울, 건물들이 '입담'을 통해 생생한 새 빛깔을 띠어 갔다.

▲ 조선군 800명이 왜군 1만7000명과 싸워 산화한 임란북천전적지. 상주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 "곡우에 내리는 비는 아주 이로운 비"라는 소설가 성석제씨의 설명에 비 사이를 걷는 마음이 즐거워진다.


출발지인 임란북천전적지에선 크지 않은 건물 '침천정(枕泉亭)'을 통해 이야기가 풀려 나왔다. 임란전적지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 800명과 왜군 주력부대 1만7000명이 싸워, 준비를 갖추지 못한 조선군이 장렬히 산화한 장소다. 아픈 역사를 되새기기 위한 유적지라고 보기엔 12채 건물이 번듯하고 잔디밭이 깔끔한데, 성씨의 기억에도 '놀러 가기 좋은 곳'으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침천정…발음하기 참 힘들죠. 고려 충렬왕 때(1307년) 만들어진 객사(客舍)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우린 모두 '심청전'이라고 불렀어요. 제대로 된 이름을 알게 된 게 10년밖에 안 됐어요. '이름의 진실'을 알게 된 충격을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라는 소설에 적었지요."

임란전적지에서 나와 북천을 따라 걸었다. 낙동강 지류인 북천 옆엔 자전거 도로가 단정하게 깔렸다. 베틀같이 비가 오가는 북천 건너편에 이 지방서 흔치 않은 '서인(西人) 서원'인 흥암서원이 내다보였다. "이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흑립백립(黑笠白笠) 사건'이란 게 있죠. 고종 혹은 순종 임금이 세상을 떴을 때라고 합니다. 서인은 이곳 흥암서원에,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은 도남서원에 모여 각자 북쪽을 향해 곡을 하는데 남인들은 흰 갓을 쓰고 서인들은 검은 갓을 썼답니다. 한쪽에선 '임금이 돌아가셨는데 어찌 격식 없이 검은 갓을 쓰고 나오는가'라고 비난하고 다른 쪽에선 '우린 임금님이 만수무강하실 줄 믿어 준비를 못했다. 임금이 돌아가실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흰 갓을 쓰다니'라고 응대했다지요." 
 
▲ 상주는 자전거 보급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 상주자전거박물관.
▲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북천'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다.
 
북천을 따라 서쪽으로 걷는 길, 깊은 웅덩이 옆 바위를 성씨는 '이방구'라고 불렀다. "경상도 말로 '바위'를 '방구'라 하죠. 저쪽에 '일방구', 이쪽에 '삼방구' 해서 여기 '방구 형제들'이 셋이 있습니다. 예전에 저 바위 위에서 담력 테스트 삼아 다이빙을 많이 했어요. 이쪽에서 지켜보던 여학생들? 물론 있었죠. 저는 '그런 건 용기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안 뛰어내렸지만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는 소설에 써먹었어요."

북천에서 '상주자전거박물관' 지나 남장사로 가는 길은 감나무 천지다. 상주는 쌀·누에·곶감이 많다고 '삼백(三白)의 고장'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지금은 곶감만 '전국 1위'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곶감은 돈 되는 음식이라 아이에게 잘 주지 않았어요. 우린 주로 감 껍질을 먹었죠. 그래도 가끔, 겨울 처마 밑에 꿰놓은 꾸들꾸들한 감을 화장실 가는 척하고 슬쩍 빼먹기도 했어요. 그 맛이 참 귀했지요." 성씨의 '곶감 자랑'을 들은 몇몇 이들은 가게에 잽싸게 들어가 20개 들이 한 봉지에 1만원쯤 하는, 하얗게 분이 앉은 곶감을 사 들고 나와 오물오물 나눠 먹기도 했다.

▲ 노음산 중턱 남장사 마루에 앉아 소설속 상주 이야기를 풀어놓는 소설가 성석제씨.

이날 걷기는 비 때문에 예정보다 경로를 약간 줄여 노음산 중턱 남장사에서 마무리했다. 남장사 마루에 걸터앉은 성씨는 부근 작은 암자에서 마주친 '따뜻한 배려'에 대한 기억을 나눴다. "남장사 오는 길에 있는 '중궁암'에 들렀을 때였어요. 마루에 흰 수건과 물방울 맺힌 주전자, 그리고 잔이 있는 거예요. '올라오면서 힘들고 목마를 테니까 마시고 가라'고 누군가 둔 모양이었어요. 소설 '여행'에 이때 받은 감동을 적었죠."

세 시간 가까이 걷는 사이 성씨와 참가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촉촉하게 젖었다. 손목에 건 곶감 봉지 속에서 두고두고 꺼내 먹을 '상주 기억' 여러 알이 뒤섞여 수다를 떠는 듯 달그락거렸다.

"달리기는 육체의 근육을 단련시키고 걷기는 정신의 근육을 만든다고 하지요. 천천히 얘기하며 걸으니 '신록의 집회'에 참석한 듯 즐거운 느낌입니다. 조용하고 따뜻하고 복된 고장 상주의 '맛'을 몸에 마음에 듬뿍 담아 가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