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민지 기자
2018.10.24 08:00:52
강력한 소비 주체로 떠오른 20~30대 여성 타깃
‘걸음마 한국' 펨버타이징…성차별적 광고 여전
“소녀처럼 달리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최대한 빨리 달리라는 의미요.”
지난 2014년 다국적 기업인 P&G의 생리대 브랜드 위스퍼가 전 세계적으로 ‘소녀답게(Like A Girl)’ 캠페인을 펼쳤다. 올웨이즈(always)는 ‘소녀다움’에 관한 편견을 깨는 이미지 광고로 큰 화제를 모았다. 광고에서 열심히 달린 어린 소녀는 인터뷰 중 위와 같이 답한다.
‘소녀처럼 달려보라, 소녀처럼 던져보라’는 주문에 어른들은 움츠러들거나 소극적인 자세를 하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정작 ‘진짜’ 그 나이 때 소녀들은 주문에 집중해 힘차게 던지고 열심히 달린다.
이 광고는 ‘나다움’이 곧 ‘여자다움’이라며 여성은 약하고 여리다는 부정적인 편견을 깬다. 실제 올웨이즈의 ‘소녀답게’ 광고는 현재까지 유튜브에서만 약 6600만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면서 펨버타이징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펨버타이징(Femvertising)'은 페미니즘(Feminism)과 광고(Advertising)의 합성어다. 여성을 상품화하는 광고의 시대를 넘어 여성을 주체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면서 소비의 주체로 끌어내려는 의도다. 20~30대 여성들이 강력한 소비의 주체로 떠오른 것도 한몫했다.
광고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김진아씨는 “소녀답게 광고는 펨버타이징의 가장 큰 모멘텀이 됐다”며 “생리대는 어디에서나 팔고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어린 여성의 존재감을 생각하는 브랜드이니 여기에 동의한다면 우리 물건을 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에 눈뜬 광고
2015년부터 미국에서는 펨버타이징 시상식이 열릴 정도로 성평등을 주제로 하는 광고들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쉬노즈미디어(She Knows Media)는 펨버타이징 어워즈(Femvertising Awards)를 주관하면서 국민 투표와 심사위원 평가를 통해 수상작을 선발한다.
지난해에는 미국 여성 의류 브랜드 레인 브라이언트(Lane Bryant)가 수상했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속옷을 입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당당한 모습을 담은 이 광고에서 “이 몸은 빛나게 된다(This Boby Is Made to Shine)”며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영국의 시장조사 업체인 유스사이트가 펨버타이징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광고는 현실적인 신체 이미지를 그려낼 책임이 있다’에 64%가 동의했다.
이어 ‘페미니즘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72%가 동의하면서 여성소비자가 페미니즘을 ‘특별한 것’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젠더 이슈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만큼 광고업계도 여성을 주체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유병욱 TBWA코리아 콘텐츠본부 국장은 “젠더 감수성을 잘못 건드리는 순간 기업이 쌓아 올린 이미지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며 “광고업계에서도 성 역할을 구분하거나 성차별적인 카피를 쓰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에 눈뜬 한국…펨버타이징 확산
한국의 펨버타이징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국내 광고를 지켜본 결과 3월 한 달 동안 국내 광고 중 성차별적 광고가 성평등적 광고보다 2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화장품이나 생리대, 여성 속옷 등 여성 제품에 국한한 펨버타이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위스퍼 코리아가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소희 태권도 국가대표를 인터뷰하는 영상을 광고에 활용했다. 힘든 운동을 즐겁게 소화해내는 김소희 선수에게 “어떻게 그렇게 운동을 하니. 나는 못할 것 같아”라고 말한다. 김 선수는 “난 그냥 즐기는 거야. 너도 할 수 있어. 너도 한번 해봐. 가능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속옷 브랜드 비너스의 올해 가을 광고에서 배우 이하늬는 “편안함을 포기하면서 아름다워지는 건 날 위한 게 아니었다”며 “편안해도 당신은 아름답다”고 메시지를 남긴다.
‘메이크업은 나의 힘’이라고 강조한 수지의 랑콤 파운데이션,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로 나오는 SK-Ⅱ, 광대뼈가 나오면 어떠냐며 자신의 외모를 긍정하는 아이소이 등 펨버타이징이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김진아씨는 “요즘은 탈코르셋 운동 등 한국에서도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펨버타이징도 소비자와 시청자에게 주목받고 있다”며 “그동안 광고에서 볼 수 없었던 77사이즈 모델이 나오는 등 초기 단계지만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혜숙 경상대 여성학과 교수도 “미디어 노출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며 “한국 광고가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면 여성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약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