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호의 Intuition] 은행의 배당잔치와 모럴해저드

by송길호 기자
2011.08.22 10:00:00

[이데일리 금융부장]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구제조치는 물리학의 질량보존 법칙과 다를 바 없다. 정부가 금융권의 부실자산을 매입하면 그 독성자산은 은행의 대차대조표에선 사라지지만 정부의 계정으로 고스란히 옮겨질 뿐이다. ‘공짜 점심’이 없는 경제현실에서 은행 주주들이나 채권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는 곧 납세자들에겐 손실이 되는 법이다.



되풀이되는 구제조치는 불가피하게 시장의 기본 작동원리인 유인시스템을 왜곡한다. 은행들은 부지불식중에 납세자들을 든든한 봉으로 생각하고 장부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위기상황에서도 내실을 다지기보단 주주들과 흥청망청 배당잔치를 벌이고 임직원들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지급할 수 있는 베짱은 이 같은 안전판에 대한 기대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론스타의 외환은행이 1조원에 이르는 분기배당을 확정한데 이어 하나ㆍ 신한ㆍ KB등 국내 주요 은행들이 모두 2조∼3조원대에 이르는 대규모 배당을 공언했다. KB금융이 순익의 절반에 가까운 돈(46.6%)을, 다른 은행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장사 평균(16.3%)을 뛰어넘는 비율로 배당을 실시하겠다고 나섰다. 대부분 주주정서, 급격히 늘어난 실적 운운하며 ‘은근슬쩍’ 진행하고 있지만, 금융권의 ‘4대천왕’으로 불리우며 기세등등한 한 은행의 최고경영자(CEO)는 ‘주주가치제고를 위해 무슨 문제냐’며 감독당국 책임자의 면전에서도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익에 대한 배당은 주주자본주의체제하에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극심한 시장 불안으로 흥겨운 배당잔치보다는 미래를 대비한 위험관리에 더욱 치중해야 한다는 경고음이 나올때, 국제적으로도 대형 은행들에 대한 감독기준이 강화되고 배당자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경계감이 높아질때, 국내 은행들의 과도한 배당은 사회적 책임에 앞서 경제논리로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더욱이 ‘사회적 보조금’을 통해 안정된 금융시스템에서 ‘땅짚고 헤엄치기’식의 손쉬운 이자놀이로 막대한 이득을 구현해 온 국내 은행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은행권의 고배당논란은 그야말로 내 지갑 털어 금융시스템을 살려낸 일반 납세자들의 공분을 살 일이다.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신용카드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이른바 나라 경제를 뒤흔든 위기 때마다 납세자들로부터 든든한 보조금을 지원받은 국내 은행들은 지금 또다시 암묵적인 모럴해저드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경제가 살아나 주가가 회복되면 고배당이든 고임금이든 비난의 물결은 약화될테고, 반면 경제가 계속 나빠져 급기야 금융권에 위험이 닥치면 우리의 친절한 납세자들은 팔 걷어 붙이고 그 비용을 대신 떠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구제조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일반 기업들이라면 국내 은행들의 이 같은 즐거운 질주를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E. 스티글리츠는 금융위기 당시 미국 은행들의 모럴해저드를 설명하며 '미국 은행들이 국민들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이렇게 경고하는 것 같다'고 비꼬았다. "당신들이 우리가 배당이나 보너스를 지급하는 걸 막거나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본확충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돈을 더 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니…” 지금 국내 은행들도 납세자들에게 이런 무언의 ‘협박’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