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육아]손주 보느라 등골 휘는 할빠·할마…황혼육아 5년새 2배 증가

by이지현 기자
2017.07.21 06:30:00

작은육아 3부 '어린이집부터 아빠육아까지'
황혼육아 2009년 26.1%에서 2014년 54%로
맞벌이 부부 친인척 위탁 육아가 과반 차지
월평균 사례비 61만원 뿐…13%는 무보수
조부모 73.8% "손주 육아 그만두고 싶다"

[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박영주(61)씨는 지난해 6월에 전남 순천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맞벌이에 주말부부인 딸 아이가 보낸 SOS에 흔쾌히 나선 한 외할머니의 원정 육아가 벌써 1년을 넘겼다.

서울로 상경할 때만 해도 ‘아이 셋을 키웠는데 젖먹이 하나쯤이야’ 했는데 지금은 3살배기 손자를 돌보는 게 버겁기만 하다.

박씨는 “내 아이 셋을 키울 때는 나도 젊었다. 지금은 하나 돌보는 데도 내가 늙었구나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힘들다”고 토로했다.

할머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자가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안아달라, 업어달라 보채는 손자를 어르다 보면 무릎이 삐걱대는 걸 느낀다.

손자가 아플 때는 내가 아이를 잘못 돌봐 그런가 싶어 괜히 눈물이 난다. 박씨는 “딸이 걱정할까 봐 무릎이 아픈 것도 힘든 것도 내색할 수 없다”며 “손자가 잘 커서 딸이 행복한 가정 꾸려나가는 게 바람”이라고 했다.

전미진(38)씨는 6살 딸과 돌이 아직 안된 아들을 둔 워킹맘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출퇴근 거리가 멀어 아침 7시면 집을 나섰다가, 저녁 8~9시에나 들어온다.

남편은 걸핏하면 야근이라 얼굴 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두 아이가 별 탈 없이 크는 건 친정어머니 덕분이다. 차로 한 시간 거리에서 사는 친정어머니는 아침 7시면 전씨의 집으로 출근했다가 저녁 9시에 돌아간다. 전씨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드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짠해져 입주 도우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씨는 “친정엄마처럼 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막막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부모들이 자녀를 대신해 손주를 돌보는 ‘황혼육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이 맡길 곳을 찾지 못한 맞벌이 부부들이 친인척에게 자녀 양육을 맡기는 ‘위탁육아’는 육아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맞벌이 가구의 영아양육을 위한 조부모 양육지원 활성화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0~2세 영아 양육을 위해 조부모(및 기타 친인척 포함)에게 육아 도움을 받는 비율은 2004년 23.6%에서 2009년 26.1%, 2012년 37.8%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4년에는 53%에 달했다.

정부는 공공보육의 전일제 확대 등을 다양한 맞벌이부부 육아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등으로 인해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기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다.

손자녀를 돌보고 있는 조부모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손자녀를 돌보는 이유에 대해 ‘자녀의 직장생활에 도움을 주려고’가 67%로 가장 많았다. 이어 △믿고 맡길만한 곳이 없어서(42.8%) △남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해서(35.6%) △자녀양육비 부담을 줄이려고(17.0%)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손자녀가 어릴수록 돌보는 시간은 길어졌다. 손자녀가 1세 미만인 경우 하루 평균 돌봄 시간은 10.57시간이었다. 만 1세~3세 미만은 8.72시간, 3~5세 미만은 5.75시간이었다. 이는 손자녀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 보육시설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조부모의 돌봄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손자녀 돌봄 대가는 73%가 정기적으로 받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불규칙적(14%)이거나 무보수(13%)였다. 이렇다 보니 월평균 사례비는 61만 1000원에 불과했다. 집에서 아
이를 돌보는 민간보육비용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노후를 즐기려 할 때 찾아온 육아부담으로 이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0명 중 6명(59.4%)이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답했다. 이 외에도 △아이돌봄으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다(41.0%) △돌보는 시간이 너무 길다(32.0%) △살림까지 같이 하기 벅차다(30.8%) 등을 토로했다. ‘인제 그만 돌봐도 된다면 그만 두겠느냐’는 물음에 73.8%가 ‘그렇다’고 답했다. ‘계속 돌보고 싶다’는 답변은 26.2%에 그쳤다.



그만두고 싶은 이유에 대해서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44.4%) △취미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려고(35.2%) △더 잘 돌볼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9.8%)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5.1%) △경제적으로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4.9%) △자식들과 불화를 더 쌓지 않으려고(0.5%) 등을 꼽았다.

호주는 ‘조부모 아이 돌봄수당’을 지급한다. 부모와 조부모 모두에게 전문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코스를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 손자녀를 주양육자로 돌보는 경우 주당 최대 50시간까지 정부가 수당을 지원한다.

일본정부는 ‘3세대 동거’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다. 조부모와 자녀, 손주까지 3대가 함께 사는 주택을 신축하거나 3대 동거용으로 개조할 경우 보조금을 주는 제도다. 조부모가 함께 살면 손주들을 돌봐줘 출산장려로 이어질 것으로 일본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먼저 나서서 조부모들의 황혼육아를 돕고 있다. 서울 서초구에서는 손자녀가 2명 이상이고 막내 손자녀가 24개월 이하인 조부모에게 보육 교육을 실시한 후 시간당 6000원씩 한 달 40시간 최대 24만원을 6~12개월 지원한다.

광주에서는 쌍둥이 또는 3자녀 이상인 손자녀가정 중 영유아 가구 소득 100% 이하 가정의 조부모에게 월 20만원의 양육비를 지급한다. 서울 강서구는 손자녀를 돌보는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올바른 육아 방법을 알려주는 ‘2017 좋은 조부모 교실’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황혼육아 지원을 보편적 보육정책으로 확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영란 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가정책으로 이를 추진하려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조부모가 도와줄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은 지원받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며 “여성가족부의 아이돌보미서비스 확대 등 대안마련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