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士)’들은 카드를 싫어해

by조선일보 기자
2006.09.27 09:12:01

변호사 등 전문직, 신용카드 꺼려한다
국세청 “내년부터 카드 거부 신고땐 5만원 포상”

[조선일보 제공] 김종석(35·대기업 대리) 씨는 지난달 3억2000만원을 주고 고대하던 26평짜리 내집 마련에 성공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요구한 ‘복비’는 120만원. 김씨가 신용카드를 꺼내 들자 중개업소 주인이 “부동산에선 카드를 쓰는 게 아니다”라며 면박을 주며 현금을 내면 110만원으로 깎아주겠다고 제안했다.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김씨, 근처 은행에 가서 현금을 인출해 값을 치렀다.

지방 Y시에서 개업한 Y변호사 사무실엔 신용카드 단말기가 아예 없다. 한 건당 200만~300만원 하는 수임료는 현금으로 받는다. Y변호사는 “변호사 사무실에 오는 사람들은 사건에 이기는 것만 관심 있지, 현금이냐 카드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용카드가 안 통하는 곳이 없는 세상이지만, 변호사·회계사·세무사 같은 전문직 자영업자들에겐 예외다.





본지가 23개 신용카드(은행계·전업계)의 업종별 카드매출 내역 통계를 통해 지난 8월 한 달 동안 한 번이라도 신용카드를 받은 업체를 분석한 결과, 변호사·법무사는 10곳 중 1곳, 회계사·세무사는 5곳 중 1곳만 신용카드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중개업의 경우 전체 업소 중 8월 한 달 동안 한 번이라도 신용카드로 결제한 곳은 전체의 0.7%에 불과했다.



변호사·법무사·변리사 등 법률사무 업종의 경우 지난 8월 1043곳에서만 신용카드 승인이 떨어졌다. 법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전국에 1만634곳(2004년말·통계청)이니, 전체의 90%는 신용카드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얘기다.

신용카드를 한번이라도 받은 이들 1043개 법률 관련 업체가 8월 한 달간 신용카드로 결제한 금액은 총 44억4000만원으로, 한 업체당 426만원에 불과했다. 변호사의 사건 수임료가 착수금만 최소 300만원이고 여기에 성공 보수가 300만~600만원이 붙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회계·세무업종도 마찬가지였다. 회계사·세무사는 전국에 1만9789명이 있으나 8월 한 달 동안 신용카드를 받은 곳은 1297곳(18%), 매출액은 28억2000만원에 불과했다. 부동산 중개업소는 훨씬 심각했다. 8월 한 달 동안 신용카드 결제를 받은 중개업소는 621곳(0.7%)에 불과했다.

그래도 한의원이나 학원은 나은 편이다. 8월 한 달 동안 전국 한의원 9196곳 중 7135곳(77%)에서 카드 매출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입시·예술·컴퓨터·외국어학원도 전체 8만9836곳 중 3만9144곳(44%)에서 신용카드가 사용됐다.

국세청은 의사·변호사·회계사를 포함한 전문직 업체(총8만개)의 89.1%(7만2000개)가 신용카드 단말기를 설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대부분 ‘장식품’이 됐다. 실제로 지난 3월 국세청이 탈세 혐의가 있는 의사·변호사·세무사·회계사 172명을 표본조사한 결과 이들은 소득의 평균 42.8%를 신고에서 누락시켜 탈세한 것으로 조사됐다.

현행 여신전문금융업법은 신용카드 가맹점이 신용카드 결제를 거부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거의 ‘죽은’ 규정이다.

국세청 진우범 전자세원팀장은 “내년부터 신용카드를 받지 않거나 현금영수증을 발급하지 않는 전문직을 신고하면 포상금 5만원을 주는 제도를 마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