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주 기업은행장 '조용한 카리스마'
by김보리 기자
2013.12.29 15:50:30
"내실있는 질적 성장 이룰 것"
"원샷인사·中企 대출 등 좋은 전통은 계승·발전 시킬 것"
[이데일리 김보리 기자] “지금 기업은행에 입행하는 여성 신입 사원들은 모두 부행장 이상을 꿈꾸게 됐습니다.” 지난 6월, 권선주 당시 기업은행 리스크 담당 부행장을 인터뷰했을 때 했던 그의 말이다. 그는 ‘평범한’ 자신도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다 보니 이런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1978년 영어교사, 기자 그리고 중소기업은행 신입행원 등 세가지 원서를 두고 고민하던 한 사회초년생은 결국 은행을 택했고 첫 여성 은행장으로 금융권 역사를 새로 썼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기업은행에 입행하면 누구나 은행장을 꿈꿀 수 있게 됐다”고. 여성 은행장으로 소감을 묻자 그는 자신의 소감이 아닌 후배들이 꿈꿀 수 있는 토양을 조금씩 만드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권선주 신임 기업은행장 취임을 두고 ‘여풍’이라고 한다. 일각에선 ‘여자’라는 이유로 오히려 인센티브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여성 은행장 이기 이전에 35년 기업은행에서 뼈를 묻은 기업은행인이다. 여성이란 프레임에 갖혀 그의 능력을 간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92년 기업은행 워커힐 지점에서 권 행장은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한 30대 초반의 남성이 상의할 게 있다면 지점 뒷문을 두드렸다. 그 사람은 창구에 앉은 권 차장에게 대뜸 “당신 때문에 부도위기에 몰렸다”며 바지 밑에서 칼을 꺼내휘둘렀다. 창구는 아수라장이됐지만 권 차장은 침착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여기서 칼을 휘두르면 내 인생이 아니라 당신 인생이 망가지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칫 사회부 사건사고가 될 법한 장면이었지만 권 차장은 조용히 이 문제를 해결했다.
권 행장을 정의하는 단어는 ‘조용한 카리스마’다. 조용하고 내향적이라는 것과 강하지 않다는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했다. ‘여성 최초의 은행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담담했다. 얼핏 외부에서 보기엔 “어느 날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됐다”는 말처럼 유리천장이 와르르 무너진 것 같지만, 공공기관으로 지정됐기에 그만큼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문화 속에서 권 행장은 유리천장에 조금씩 다가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창구업무로 시작한 그는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외환, 여신 등으로 업무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입행에서 첫 지점장을 단 97년까지 금융연수원 교육과정인 ‘통신연수’의 모든 과정을 20년 가까이 달고 살았다. 인문학도인 그의 자강불식 비법이다.
이제 그는 은행원으로서 35년 경험을 행장으로 발현하고자 한다 . 이 역시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그 만의 실용주의를 택할 것으로 보인다.
“‘내실있는 질적 성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전임 조준희 행장이 만든 좋은 전통을 잇는 대신에 이를 더욱 탄탄히 할 것입니다.” 행장이 바뀌면 전임 행장이 추진하던 모든 업무가 올스톱되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 된 다른 은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전임 행장이 내실 경영 ‘원년’을 선포했다면 그는 이제 이를 공고히 하는 업무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소기업 대출, 근무시간 정상화 등 조 행장이 이뤄놓은 좋은 전통을 그대로 잇겠다”며 “좋은 전통은 그대로 잇 돼, 이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 은행장이 오면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일각에서 기업은행의 주 업무인 중소기업 대출 업무를 한번도 해 보지 않았던 그가 기업은행을 잘 이끌 수 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는 ‘기우’라고 강조한다. “영업현장에만 25년 있습니다. 우려야 당연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우려는 불식될 것입니다.” 권 행장은 임기가 시작되기 전 지난 27일 오전 임원회의를 주재했다. 업무공백을 줄이기 위해서다. 권 행장이 일구는 내실경영은 그렇게 또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