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지도(法頂之道). 텅 빈 충만에 다가가는 길

by조선일보 기자
2010.03.25 12:00:00

일본 시코쿠 88개 순례길과 길상사 가는 길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 순례

[조선일보 제공]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네 개의 섬 중 가장 작고 이렇다 할 관광지가 적은 시코쿠(四國). 이곳은 백번 양보해도 일본 최고의 여행지라고 우기긴 어려운 곳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도쿄의 마천루도, 일본적인 것이 무언지를 보여주는 교토의 천년고찰도, 대자연의 위용을 마음껏 드러내는 홋카이도의 드넓은 평야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크게 관심 갖지 않는 이곳에 처음 오게 된 것은 순례가 아니라 순전히 한 줄기 우동 면발 때문. 영화 '우동'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우동에 관한 장엄한 내레이션을 듣는 순간, 죽기 전에 반드시 이곳을 찾아 그 유명한 사누키 우동 한 그릇을 먹어봐야겠다는 숙명 비슷한 것이 생겼다. "인구 1000만명이 넘는 도쿄에 있는 맥도날드 매장은 500여 군데, 그런데 인구 100만명이 사는 사누키의 우동집은 무려 900여 군데. 사누키는 한마디로 우동의 천국이다."

▲ 아름다운 침묵이 충만한 사찰, 서울 길상사. 욕망을 버린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조선영상미디어

하루의 한 끼는 무조건 우동을 먹고 사는 '우동왕국'의 자취를 찾아 시코쿠 섬을 뒤지던 중 우연히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손에 쥔 한 거룩한 순례자를 발견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이고,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일까.시코쿠에는 오헨로(お遍路) 혹은 헨로미치라고 불리는 88개의 순례길이 있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이 위대한 순례길을 홀로 걷는 중. 1번부터 88번까지 시코쿠의 크고 작은 절들을 돌아보는 시코쿠의 순례길은, 대다수가 불교도인 일본 사람들이 일생에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최고의 여행 코스다. 헨로미치가 이처럼 위대한 순례 코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무려 1200여 년 전의 일. 시코쿠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위대한 고승 홍법대사,구카이(空海)의 여정을 사람들이 하나 둘 따라 걷기 시작하면서 첫 번째 절 료젠지(靈山寺)부터 88번째 절 오쿠보지(大窪寺)에 이르는 아름다운 88개의 순례길이 만들어졌다. 홍법대사는 일본의 알파벳으로 불리는 '히라가나'를 만들어낸 인물로, 단순히 승려를 넘어 '글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린 고승. 글로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했다는 점에서 어쩐지 최근 입적한 법정 스님의 삶이 연상된다.


길상사를 향해 걷는 동안 시코쿠의 순례길이 떠오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길상사가 자리 잡은 성북동은, 크게 관심 받지는 못하지만 알고 보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가득 안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시코쿠와 비슷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1400㎞에 달하는 긴 순례길은 없지만 세속적인 가치를 좇으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길들이 길상사를 향해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다. 길상사는 바로 그 성북동의 고갯마루에 있는 '사연 많은 사찰'이다.

원래 이곳은 밤 문화를 주도하는 고급 요정으로 유명했으나 법정 스님의 저서에 감명받은 김영한 보살이 자신이 소유한 대원각의 대지 7000여 평과 건물 40여 동을 불교의 수행도량으로 써달라고 기증의 뜻을 비치면서 대원각의 대대적인 환골탈태가 시작됐다.

처음 법정 스님이 대원각 기증 제안을 받았던 것은 1987년의 일. 하지만 법정 스님은 "평생 주지 노릇은 해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주지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며 한사코 김영한 보살의 제안을 거절했다.



훗날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이끌며 시민운동에 앞장선 법정 스님이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모임의 근본 도량을 만드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 8년의 기다림, 네 차례의 사양 끝에 전한 긍정의 답변이었다.

길상사는 사찰로 치면 아직 엄마 젖도 떼지 못한 유년기의 절에 가깝다. 오래된 절에서 풍기는 시간의 냄새 대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한결 충만하게 흘러나온다. 열정은 다치기 쉽고 위험하다는 말은 다행히 길상사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법정 스님이 입적한 후 세상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곳은 여전히 동요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법문을 읽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기쁨이나 슬픔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표정의 무소유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인하게 서려 있다. 아름다운 침묵, 텅 빈 충만이 고요하게 흐르는 사찰이다.

나무에 걸터앉아 명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시코쿠 순례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의 평온한 표정이 겹쳐 보인다. 두 길 모두 무언가를 열심히 얻으러 가는 대신 내면의 욕망을 시원하게 버리러 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많다. 

버리는 자는 진정한 평온을 얻게 되는 것일까. 사찰을 맴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무소유의 평온이 흐른다. 발끝의 힘을 빼고 모두 날아갈 듯 걷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순례길을 걷는 묘미. 멀어도 힘겨워도, 무언가를 버리러 떠나는 길은 언제나 즐겁고 신명나는 일이다.



한성대입구 역(차로 5분, 걸어서 15분)→ 길상사(걸어서 15분)→ 시 '성북동 비둘기'가 태어난 비둘기길(걸어서 20분)→ 작가 이태준 선생의 집을 개조해 만든 전통 찻집 수연산방(걸어서 10분)→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기거하며 원고를 썼던 심우장(버스로 5분)→ 한성대입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