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by김호준 기자
2021.10.30 15:16:17

강삼권 벤처기업협회장. (사진=김태형 기자)
[강삼권 벤처기업협회장] 유망 중소기업으로 촉망받는 A사가 겪은 이야기다.

A사 대표는 오랜 기간 거래했던 기업에 방문했다가, 자사 제품과 동일한 제품이 다른 기업으로부터 납품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사 대표는 즉각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으나, 침해 제품이 시중에서 거래되지 않아 침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고 결국 소송을 중간에 포기해야 했다.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거래해왔던 기업이 비협조적이었음은 물론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B사는 자사 특허를 침해한 제품을 제작한 기업을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으나, 해당 제품을 납품받는 기업으로부터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거래를 단절하겠다는 경고를 받았다.

결국 B사는 소송을 중간에 포기해야만 했고, 이후 당연하게도 기존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동일한 제품을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

위 사례는 그나마 소송을 진행한 경우이지만, 증거수집의 어려움과 거래관계 단절 위험 등 이유로 특허침해 및 기술탈취 대응을 포기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정부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해 특허침해와 기술탈취 근절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수립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유사한 사례들이 계속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우리 소송제도에서 특허침해, 기술탈취에 적합한 증거수집제도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허를 침해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특허 침해자가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침해자에게 불리한 자료를 침해자가 스스로 제출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침해를 용이하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주요국들은 침해 증명에 필요한 자료가 소송 과정에서 제출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소송과 관련된 증거를 당사자들이 광범위하게 교환하고, 고의적으로 자료를 은닉하거나 훼손하면 패소에 이르게 되는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영국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미국보다 먼저 운영해왔다.

우리와 법 체계가 유사한 독일과 일본도 전문가가 침해 현장에서 증거를 조사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근대법의 기초가 되는 나폴레옹 법전의 나라 프랑스는 민사에서도 강력한 압류명령제도를 운영해 법원의 명령을 받은 집행관이 현장에서 침해증거를 압류할 수 있다.

중국도 올해 상반기부터는 공무원이 행정조사 과정에서 현장조사와 증인신문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수집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주요국들이 예외 없이 증거수집제도를 운영하는 이유는 특허권에 대한 적절한 보호가 이뤄질 때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성장하고, 이를 통해 국가 산업 경쟁력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개발한 기술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는데, 억울함을 해소하기가 어렵고 기술을 베낀 자가 오히려 쉽게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느 기업이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최근 우리 국회와 정부도 특허침해소송에서 증거수집제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일부 업계에서 제도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우리나라를 제외한 주요국들이 모두 특허권을 강력하게 보호하기 위해 증거수집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정부가 미흡한 부분을 제도적, 정책적으로 보완하도록 하고 다 같이 힘을 모아 새로운 제도가 신속하게 도입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다.

증거수집제도가 개선돼 제2의 A사, B사가 기술침해로 성장동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 주역으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