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서점… "추억도 팔고 책도 팝니다"
by조선일보 기자
2010.02.18 11:41:00
[조선일보 제공] 서울 신촌 연세대 근처에 있다가 2000년 폐점한 사회과학서점 '오늘의 책'이 대학로 풀빛극장에 짐을 푼다. 무대를 서점으로 꾸민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다.
공연을 1주일 앞둔 16일 찾은 이 소극장에는 헌책 6000권이 터를 잡고 있었다. 시간은 정직하다. 헌책들은 너나없이 누렇게 변색돼 정겨운 냄새를 풍겼다. 빨간 밑줄, 깨알 같은 메모도 남아 있었다. 읽은 사람이 책과 함께 숨을 쉰 흔적이다. 《오늘의 책…》을 쓰고 연출한 김재엽(37)은 "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일 뿐"이라며 "'오늘의 책'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 여전히 새록새록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극단 드림플레이의 《오늘의 책…》에는 사실과 허구가 동행한다. 이 연극은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던 국문과 91학번 4명이 오랜만에 재회하며 시작된다. 일간지 기자가 된 광석, 단편영화 감독 재하, 대학원생 현식, 그리고 이들이 짝사랑했던 유정이다. 유정이 모교 앞에 '오늘의 책'이라는 헌책방을 개업한 것이다.
| ▲ 연극《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무대에 세워 놓으니 사회과학서점 주인 같은 극작가 겸 연출가 김재엽은“무거운 것도 재미있게 풀려고 한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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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과 92학번인 김재엽은 "제가 운동권이었다고 말하긴 민망하고, 그 언저리에 있었지요. 선배들에게는 '어설픈 후배', 어른들에겐 '세상 바뀌었는데 시위나 하는 철부지'로 비쳤던 세대입니다. 이제 우리도 30대 후반의 기성세대가 됐으니 청춘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똑바로 살아야지' 하는 다짐입니다."
유정의 헌책방에 모여든 남자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을 뒤적거리면서 추억에 젖는다. 해묵은 오해와 상처,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충돌하며 연극은 요동친다. 김재엽은 "이 연극을 본 선후배들이 다들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유정이가 나 아냐?'라고 묻더라"며 웃었다.
《오늘의 책…》은 지난 2006년 '혜화동1번지 4기 동인 페스티벌'에서 초연돼 호평받았다. 그런데 이번 무대는 폐막일을 정하지 않은 오픈런(open run)이다. "스타도 없고 대중적인 코미디도 아니니 '무모한 도전'이지요. 많이 망설였지만 지원금 받아 공연하는 방식으론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가볼 겁니다."
이 연극에는 "친구여, 너의 웃음은 투쟁의 소중한 희망이었고~"로 흐르는 노래 〈편지3〉, 기형도의 시 〈대학 시절〉 등 30~40대의 추억을 건드리는 장치가 많다. 매일 공연 시작 4시간 전부터 무대를 개방하고, 배우나 스태프가 헌책을 1000~2000원에 판매할 예정이다. 진열된 책은 고려대 근처에 있다 폐점한 장백서점 등에서 가져왔다. 김재엽이 가장 좋아하는 김소진의 단편집 《자전거 도둑》을 비롯해 그의 방에 꽂혀 있던 책들도 있다.
7년차의 젊은 동인제 극단인 드림플레이는 《유령을 기다리며》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같은 창작극을 통해 진지한 주제를 경쾌한 무대언어에 담아왔다. 올해는 지난해의 숱한 죽음들에서 영감을 얻은 《타인의 고통》, 입시 전쟁을 다룬 《학교종이 땡땡땡》 같은 신작을 준비 중이다. 김재엽은 "동아리 활동으로 출발해 의무감이나 부담감이 없다. 하고 싶은 얘기를 명확히 하고 재기발랄하게 비판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