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피용익 기자
2019.03.02 06:06:06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지난 2011년 5월3일 미국 뉴욕 맨하탄의 컬럼버스 서클에 위치한 서점 보더스에서 머틀리 크루의 베이시스트 니키 식스의 자서전 싸인회가 열렸다. 오후 7시부터 시작한다고 공지했지만,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부터 이미 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오후 5시쯤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줄의 인파가 늘어섰다. 모두들 방금 서점에서 구입한 니키 식스의 자서전 “This Is Gonna Hurt”을 들고 있었다.
이에 앞서 2010년 8월4일 메가데스의 리더 데이브 머스테인이 보더스 월스트리트점에서 “Mustaine: A Heavy Metal Memoir” 싸인회를 했을 때도 책에 싸인을 받기 위한 팬들은 서점을 가득 채우고 정문 밖까지 줄을 섰다.
록 스타의 팬 싸인회는 다른 작가들의 행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문신을 한 머리 긴 남자들이 모여드는 것도 그랬고, 여성 팬들이 뮤지션 앞에서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는 것도 진풍경이었다. 공공장소에서의 가슴 노출을 막기 위해 일부 싸인회에는 경찰이 동원되기도 했다.
기자는 2시간 넘게 줄을 선 끝에 데이브 머스테인으로부터 책에 싸인을 받고, 약 30초 동안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다만 니키 식스는 여성 팬들과 함께 몇십분씩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4시간을 줄서고도 결국 싸인을 받지 못했다.
한동안 록 스타들이 쓴 자서전이 인기를 끌었다. 니키 식스와 데이브 머스테인 외에도 키이스 리처드, 패티 스미스, 오지 오스본, 새미 해거 등이 2010년을 전후해 잇따라 자서전을 출간했다.
일각에선 로커들이 글을 읽을 줄도 모를 정도로 무식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글을 쓸 줄도 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너도나도 집필에 나섰다. (오지 오스본은 난독증 때문에 글을 쓸 줄 몰라 크리스 에이어스라는 작가가 대신 써줬다.)
당시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몇몇 자서전이 인기를 끌자 나타난 ‘카피캣’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무엇보다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던 뮤지션들은 자서전을 쓸 수 있을만한 나이가 됐고, 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많다. 섹스와 술, 그리고 마약에 대한 얘기만 써도 끝이 없다.
키이스 리처드의 자서전에는 그가 복용한 마약의 종류와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들, 심지어 밴드 동료 믹 재거의 성기 사이즈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니키 식스의 또 다른 자서전 “The Heroin Diaries”에는 자신이 헤로인 중독으로 2분 동안 사망 상태에 있었으며, 건스앤로지스 기타리스트 슬래쉬의 여자친구가 입으로 인공호흡을 해줬다는 얘기도 있다. 단지 유명 록 스타가 쓴 책이라는 이유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팔리는 것이다.
그랜드 센트럴 퍼블리싱 관계자는 “키이스 리처드의 자서전이 호평을 받으며 성공한 이후 출판업계는 뮤지션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뮤지션들 역시 자신들이 쓴 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자서전은 전성기가 지난 뮤지션들에게 쏠쏠한 돈벌이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롤링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이스 리처드의 자서전 “Life”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하드커버 부문에 22주 동안 머무르며 700만달러 어치가 팔렸다. 에어로스미스의 보컬리스트 스티븐 타일러의 자서전은 선주문이 쇄도하면서 책 출판 전에 이미 6쇄를 하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다. 패티 스미스의 “Just Kids”는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최근에는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로커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출판업계는 언젠가 엘튼 존이나 폴 매카트니 등 거물급 록 뮤지션의 책이 나오면 다시 자서전이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