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형제' 뒤통수쳤다…의리 대신 실리 택한 쿠바 대통령
by박종화 기자
2024.02.17 11:00:00
[글로벌스트롱맨]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
''형제적 연대성'' 北과 약속 대신 韓과 수교 선택
혁명 이후 태어난 첫 쿠바 정상…개방적 성격
"韓, 개발협력 프로그램·재원 갖춘 나라" 쿠바 내 기대감
세계엔 다양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같은 정치를 두고도 누군간 독재, 누군간 강력한 카리스마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쎈캐(스트롱맨)’들을 통해 그 나라를 보고 한국을 돌아봅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박종화 기자] “노련하고 의심할 여지 없는 전사인 김일성 동지가 AK소총 10만정과 탄약을 단 1센트도 받지 않고 보냈다” ‘쿠바 혁명의 아버지’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013년 회고록에서 소개한 일화다. 1980년대 쿠바는 소련으로부터 군사 지원이 끊기면서 안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카스트로와 쿠바에 손을 내민 나라가 북한이다.
| 2018년 방북 당시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포옹하는 미겔 디아스카넬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사진=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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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듬해인 1960년 외교관계를 맺은 이래 북한과 쿠바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우방 사이였다. 쿠바혁명 이후 쿠바가 한국과 교류를 단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냉전이 무너진 후에도 쿠바는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로 북한만 인정한다는 약속을 지켜왔다.
두 나라는 세계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 공산주의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체 게바라는 1960년 북한을 방문한 후 “미국과 폭격과 침략으로 생긴 잿더미 속에서 자란 나라”라며 북한이 쿠바의 롤모델이라고 평했다. 이후 피델·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미겔 디아스카넬 현 대통령 등 쿠바 정상들은 북한을 찾아 두 나라 우애를 과시했다. 1986년 피델의 방북 당시 북한과 쿠바가 맺은 친선조약엔 두 나라 관계를 “형제적 연대성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디아스카넬도 2018년 평양을 찾아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공항에서 디아스카넬을 직접 맞이했다. 김정은은 “이번 (디아스카넬의) 방문은 두 나라 인민의 전통적인 우정과 신뢰, 친선단결의 불패성을 과시하는 계기로 되며 우리 인민의 정의의 위업에 대한 지지와 연대성의 표시”라며 디아스카넬을 환영했다. 그는 올 1월 1일 쿠바혁명 65주년을 맞아 디아스카넬에게 보낸 축전에서 양국 관계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 속에서 맺어진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통적이며 동지적인 친선협조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런 후대를 받았던 디아스카넬이 북한의 뒤통수를 쳤다. 한국과 쿠바 외교당국은 14일 외교관계 수립을 선언했다. 양국은 북한이 수교를 방해하는 걸 막기 위해 극비리에 대화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디아스카넬은 협상 상황을 수시로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디아스카넬(왼쪽 두번째부터)와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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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카넬은 쿠바의 혁명 이후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전까지 피델 카스트로(1959~2008), 라울 카스트로(2008~2018) 형제가 60년 가까이 쿠바를 통치했다. 라울 카스트로가 29살 차이인 디아스카넬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줬을 때 ‘세대교체’라는 평이 나온 이유다. (2019년 쿠바는 국가수반을 국가평의회 의장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고 디아스카넬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북한과의 오랜 약속을 깨고 한국과 수교를 결정한 데에도 이러한 세대 차이가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자공학도 출신인 디아스카넬은 라울의 경호원을 맡으며 일찍부터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보수적·경직적인 다른 쿠바공산당 간부와 달리 개방적·자유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한때 장발을 기르고 비틀즈 음악을 즐겨들었다. 디아스카넬이 조직을 맡았던 비야클라라에서 다른 쿠바 지역과 달리 록콘서트와 성소수자 클럽이 허용됐다. 당시 그와 아깝던 후안 후안 알메이다는 “디아스카넬은 지식인층과 어울리고 콘서트에 참여하며 젊은이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비야클라라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쿠바공산당 중앙위원과 고등교육부 장관을 거쳐 국가평의회 수석부의장까지 오르며 라울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2018년 마침내 쿠바의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그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시위의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시장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새 헌법을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영업이 가능한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또한 시장 왜곡을 해소하기 위해 일반 페소화와 달러화와 연동돼 수입업체·외국인이 사용하는 태환페소로 나눠진 이중 통화제도를 하나로 통합했다.
문제는 이 같은 작업이 지금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복원하면서 쿠바 경제의 성장 동력이 식기 시작했다. 그간 쿠바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줘던 베네수엘라 지원도 자국 경제가 악화하면서 크게 줄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쿠바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핵심 산업인 관광업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유엔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경제위원회에 따르면 2019~2022년 쿠바의 실질 국내총생산(GDP)는 8% 넘게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화폐 개혁은 인플레이션을 자극, 지난해에만 30% 가까이 물가가 올랐다. 이는 생활고에 시달린 시민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로 500명 넘는 사람이 지금까지 감옥에 갇혀 있다. 도 아바나에서 교사로 일하는 소냐 누네즈는 “달러 가치가 계속 오른다”며 “세제 조금, 토마토 퓨레 조금을 살 만한 3달러를 벌려면 죽으라 돈을 벌어야 한다”고 로이터 통신에 말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밀항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디아스카넬이 한국과의 수교를 결심한 것도 외부 도움을 통해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쿠바 외교관 출신인 카를로스 알주가라이는 “외교 관계 수립은 한국 기업의 아바나 사무소 개설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며 “한국은 개발 협력과 무역 금융, 기술 지원을 위한 가장 발전된 프로그램과 재원을 갖춘 나라”라고 BBC에 말했다.
다만 한국과의 수교가 쿠바가 경제난을 탈출할 직접적인 돌파구가 되긴 어렵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물론 쿠바 내부의 구조적 한계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경제 개혁에 소극적인 보수적 당·군 간부가 대표적이다. 디아스카넬도 이들에 포위된 채 제대로 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쿠바 경제 상황에 “부패한 시스템을 약간 조정하는 것만으론 쿠바의 쇠퇴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