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마켓워치]<29>`닥터코퍼` 오작동? 구리값은 왜 뛸까

by이정훈 기자
2020.09.19 09:37:09

`경제학 박사학위` 보유한 구리, 경기 진단기능 가져
코로나19 팬데믹에 추락한 구리값, 6개월새 V자 회복
구리값 2년 3개월래 최고…美국채금리보다 빨리 올라
달러약세에 남미 생산 차질…중국수입 급증까지 겹쳐
경기 회복에 선행…코로나 안정땐 경기 선행성 강화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원소기호 `Cu`인 구리(Copper)는 경제학 박사 학위(Ph.D. in economics)를 가진 금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리를 굳이 `닥터 코퍼(Dr. Copper)`라고 부르죠. 그런데 인간도 따기 힘든 경제학 박사 학위를 대체 구리는 어떻게 갖게 된 걸까요.

무르고 전성과 연성이 있으며 열과 전기 전도성이 뛰어난 구리는 전기와 열을 잘 전달하는 도체라 전선이나 난방용 배관으로 이용되는 것은 물론 건축과 금속합금, 선박 등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산업용 재료입니다. 실제 구리개발협회(CDA)에 따르면 전체 구리 중 65%가 전기분야, 25%는 산업분야, 나머지 10%가 운송과 그 외 분야에 각각 쓰입니다. 이렇다 보니 구리값은 향후 경기 사이클을 진단해주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꼽히며, 이것이 바로 구리에게 박사 학위를 씌워준 계기가 된 겁니다.

실제 ABN암로가 지난 2014년 구리값과 글로벌 경제활동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봤더니 미국과 유럽, 중국에서의 지역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구리값과 매우 강한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이를 테면 구리를 사겠다는 주문이 줄거나 취소가 는다면 가격이 떨어지죠. 그리곤 이 구리값 하락은 경기가 침체국면으로 가고 있다는 걸 말해 줍니다. 반대로 구리 주문이 늘고 가격이 덩달아 상승한다면 이는 경기가 탄탄해지고 산업에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업적 측면에서 본다면 구리의 가장 큰 수요처는 전기 추진체와 각종 의료기기, 신재생에너지 시스템, 초전도 나노탄소 등 신성장산업이고,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의 인프라산업입니다. 그래서 구리의 수요는 신산업이든 전통산업이든 글로벌 경제 성장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겁니다. 또 구리값 역시 글로벌 경제 성장이나 성장 기대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추락했던 구리값이 거침없는 회복세를 보이며 파운드당 3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그렇다면 올 들어,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전 세계적 대유행) 이후 구리값은 어떤 흐름을 보이고 있을까요. 이는 코로나19로 인해 급격히 위축된 경제활동의 복원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이 `닥터 코퍼`에게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8년 여름 파운드당 3.3달러까지 치솟았던 구리값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긴축정책 앞에 힘을 쓰지 못한 채 하락세를 이어갔고, 작년 하반기에 다소 반등했어도 올 초를 2.8달러 정도에서 출발했었습니다. 그러나 연초부터 코로나19가 중국과 동아시아, 유럽 등지를 넘어 미국까지 덮치자 구리값은 급전직하 하고 말았습니다.

연준이 무제한 양적완화를 발표했던 지난 3월23일 연저점인 2.17달러를 찍었죠. 그리고 그 나흘 뒤인 3월2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총 2조달러 규모의 코로나19 재정부양 패키지법(CARES Act)에 서명하자 현재 3.06달러까지 올랐습니다. 단순히 V자형이 아닌, 폭이 아주 좁은 V자형 회복으로, 현재 구리값은 지난 2018년 6월 이후 2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최근 구리값이 금에 비해 더 큰 폭으로 오르고 있고, 그로 인해 미 국채 금리와도 다소 디커플링 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구리값 상승이 빠르게 나타났다는 것 뿐 아니라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하나 더 나오는데요. 구리는 여러 산업에 활용되는 필수재라는 점에서 위험자산 선호를 반영하고 있구요. 그래서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금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광물이라는 점입니다. 자연스럽게 둘 중 어느 쪽 가격이 더 쎈지 보면 현재의 경기나 시장 내 위험자산 선호 정도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금값대비 구리값 비율을 구하면 그 값이 미 국채금리와 뚜렷한 동행성을 보인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값에 비해 구리값이 더 강하다면 이는 향후 경기 회복 기대가 더 커 시장 내 위험자산 선호가 더 강하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미 국채금리는 위로 올라갈 것이라는 얘기죠. 흥미롭게도 최근 시장 모습이 바로 이 예에 딱 들어 맞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닥터 코퍼`는 지금 미국이나 글로벌 경제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뜻인데요. 과연 그럴까요.

일단 구리값이 이렇게 강한 상승세를 타는데 가장 큰 힘이 된 건 아무래도 글로벌 달러화 약세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 지난 3월 중순에 102.8까지 올라갔던 달러인덱스는 현재 93.0선까지 내려와 불과 6개월 사이에 10%나 추락했습니다. 달러로 거래되는 원자재의 특성 상 이같은 달러 약세는 구리를 포함한 광물금속 가격의 상대적 상승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알루미늄을 비롯한 다른 광물금속에 비해 구리값 상승세가 더 가파른 것은 비단 달러 약세 뿐 아니라 수급상 요인도 함께 작용하고 있습니다. 공급 측면에서 구리가 귀해지고 있다는 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2위 구리 생산국인 페루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최근 수개월 간 필수인력만 투입하면서 광산에서의 채굴량이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올들어 7월까지만 생산량이 전년대비 최대 25% 줄었다는 추산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다른 최대 생산국인 칠레는 구리값이 뛰자 생산을 늘리려 하는데도 생산인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이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올해 구리 생산량이 지난 2016년 이후 4년만에 최저수준이 될 것으로 점치고 있습니다.

주요 국가에서의 산업용 금속 생산량이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쇼크로 칠레와 페루의 자국내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광산업체들도 어려움이 커지면서 채굴을 위한 추가적인 자본 투자지출이 줄어 내년까지도 공급량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올해 115만톤 정도 줄어든 구리 생산량이 내년이면 어느 정도 회복되겠지만, 칠레 추키카마타 등 여러 구리 광산개발 프로젝트가 멈춰 있거나 지연되고 있어 공급량이 확연히 늘긴 어려울 듯 합니다. 현재 BoA는 내년에도 글로벌 구리 공급량이 수요대비 6%, 18만8000톤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코로나19를 일찍 얻어맞은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회복세를 타면서 구리를 비롯한 산업용 금속 수입을 늘리고 있는 것이 수요 측면에서의 가격 상승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중국은 전 세계 구리 소비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인데요. 그래서 구리값은 중국 경제흐름과도 밀접한 연동성을 가집니다.

이에 착안한 에릭 놀랜드 CME그룹 집행이사 겸 시니어 이코노미스트는 구리값이 중국 총리인 리커창의 이름을 따서 만든 리커창지수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지적했는데요. 중국 내 은행 융자(대출)와 철도화물 규모, 전기 생산을 합쳐 블룸버그가 만든 보완적인 실물경제지표가 바로 리커창지수인데요. 최근 중국 국내총생산(GDP) 하락과 별개로 이 지수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 5개월 연속 상승하며 경기 확장 판단의 기준이 되는 50선을 넘어선 중국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에도 선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GDP 성장률이 큰 폭으로 하락한 가운데서도 최근 리커창지수가 빠르게 반등하고 있다.


이처럼 제조업이 회복돼 이 분야 신규 수주가 늘어나면 원자재 수요도 늘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중국은 올들어 상반기에만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4만톤 이상 많은 구리를 수입했습니다. 같은 기간 작년 수준인 철광석, 50% 줄어든 철스크랩(고철) 수입량을 감안해 로이터 등 서구권 언론에서 “중국 정부가 향후 구리값 회복을 예상해 실제 수요보다 훨씬 많은 구리를 사재기해 재고량을 늘리고 있다”고도 지적할 정도입니다.

최근 중국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구리를 비롯한 산업용 금속 가격이 더 뛸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진 않지만, 얼마 전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쇼크에서의 교훈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으로 인해 향후 에너지와 산업용 금속, 농산물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비축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조치는 내년부터 2025년까지 5개년에 걸쳐 진행될 것이고, 그 대상은 원유와 구리, 알루미늄, 텅스텐 등이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볼 때 구리를 비롯한 산업용 필수 금속 가격은 좀더 상승할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7~8월에 이미 역대 최대치에 육박한 중국에서의 수입이 앞으로도 가파르게 늘지는 좀더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달러화도 추가 하락보다는 횡보양상을 보이고 있구요. 이런 가운데 남아메리카에서의 코로나19가 더 악화하지만 않는다면 공급도 바닥을 찍고 완만하게나마 회복될 수도 있을 겁니다.

주요 5대 산업용 금속 가격이 글로벌 수출규모에 비해 조금 더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이제 다시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닥터 코퍼`로서의 구리의 경기 진단 기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현재 구리값 상승은 글로벌 경제가 가진 펀더멘털에 비해 앞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현재의 글로벌 경기를 진단하는 구리의 신호체계가 약간 오작동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회복되고 있는 북반부 경제 상황이 수요 증가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남반구 상황이 공급 감소로 이어져 구리값이 이중으로 수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구리의 경기 진단 기능은 분명히 약화돼 있습니다. 즉, 구리값과 경기와의 동행성이 약해졌다는 건데요. 그렇다고 해서 구리의 경기 전망 기능까지도 부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아주 강해진 않아도 구리값이 경기에 선행성은 보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코로나19가 서서히 진정되면서 구리값은 차츰 투기적인 수요가 주는 대신 인플레이션 기대에 따른 수요가 받쳐줄 것이고, 그럴 경우 구리의 경기 선행성은 보다 뚜렷해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