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온 편지] 54.런던과 올리가르히

by함정선 기자
2018.06.04 07:57:16

러시아 올리가르히가 부동산 투자 지역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 지역(출처=보참프 에스테이츠)
[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미국이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측근인 올레그 데리파스카 루살 회장을 러시아 정부를 겨냥한 기업 및 개인 제재 리스트에 올리면서 영국에도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미국 재무부는 러시아의 시리아 정부 지원, 사이버 공격, 크림 반도 강제 합병 등을 러시아 재벌 기업인 등 38명의 제재 이유로 들었습니다. 올리가르히(신흥재벌) 집단이 푸틴 정권에 기대 이득을 취했으며 푸틴 정치 및 군사적 아젠다 등을 지원해왔다는 것이죠.

미국의 제재 발표 이후 데리파스카가 이끄는 러시아 최대 알루미늄 기업인 루살은 모스크바 증시에서 주식가치가 30% 넘게 빠졌습니다.

데리파스카는 푸틴과 친분이 있으며 그와 주기적으로 접촉하는 러시아 올리가르히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현재 미국 로버트 뮬러 특검의 ‘러시아의 미국 2016년 대선 개입 사건’ 수사와 관련해 사기죄 등으로 조사받고 있는 폴 매너포트 전 트럼프 대선캠프 선대위원장이 앞서 수년간 데리파스카를 위해 일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죠.

그렇다면 데리파스카와 영국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요.

데리파스카는 루살의 모기업이자 자신이 당시 지분 70%가량을 소유한 En+의 런던 증시 상장을 계획하고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 시절 에너지 장관을 지냈던 그레고리 바커를 En+ 회장으로 영입했습니다. 영국 금융당국은 런던 증시 상장을 승인했고 En+는 작년 11월 런던 증시에 상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영국 해외 정보 담당기관 MI6는 군수산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영국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인 데리파스카가 이끄는 En+이 런던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승인하는데 금융당국이 정보기관과 적절한 논의가 없었다고 지적했었죠. 루살은 당시 홈페이지 회사소개에 군수품에 들어가는 금속파우더를 생산한다고 적어놓았습니다.

당시 En+는 런던 증시 상장으로 10억파운드(약 1조5000억원)를 조달하고 일부를 러시아 국영은행 VTB에 부채 상환 명목으로 줬습니다. 이 은행은 En+ 지분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미국과 EU에서 자금조달을 하지 못하도록 제재한 은행이죠. VTB는 En+의 런던 증시 상장에 주간사로도 참여해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국 정치권 일각은 금융당국이 왜 애초에 En+의 런던 증시 상장을 승인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빈스 케이블 자유민주당 대표는“En+ 상장과 관련해 리뷰가 있어야 한다”며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이 런던 금융시장을 자금 조달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깐깐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존 맥노넬 노동당 의원도 “런던이 러시아 정부와 관련이 있는 올리가르히를 제재하는데 느슨한 곳으로 보여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요.

야당을 중심으로 한 영국 정치권은 금융감독청(FCA)이 런던 증시 상장 기업 심사와 관련해 더욱더 정밀한 검증을 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런던 은행, 로펌, 회계사 등 런던 금융계가 En+증시 상장으로 대규모 수수료를 챙겼는데 이처럼 런던 금융산업의 이윤을 위해 느슨하게 상장 기업 심사를 진행한 것이 아니냐고 꼬집는 것이죠.

사실 영국은 그 동안 인권탄압, 부패 등과 연관된 러시아인들이 부정축재한 돈을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부호들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재산에 대한 법적인 보호, 좋은 교육 시스템 등을 갖춘 영국에 가족들을 데려와 제2의 집을 사고 투자를 하면서 부패와 연관된 돈을 깨끗한 돈으로 세탁하고 아이들을 교육시켰죠.

반부패 비정부 감시기관인 글로벌 위트니스에 따르면 영국령 조세회피처 등에만 러시아 올리가르히가 축적해 놓은 자산은 460억달러 달하고 영국 본섬에도 수십억달러를 축적해 놓은 것으로 집계됩니다.

미국 등이 2012년부터 인권탄압과 관련된 러시아인들의 비자를 거부하고 미국 내 부동산 등을 사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제재를 도입하기 시작했지만 영국은 자국 내 이같은 제재를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죠. 러시아인이 런던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런던 금융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런던이 벌어들였던 이익 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다만 이같은 비난을 의식한 영국 정부가 최근 외국인들이 불법적인 사용을 위해 런던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거나 돈세탁하는 것을 조금은 더 어렵게 만드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어 영국이 ‘돈세탁 허브’라는 오명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영국 정부는 최근 러시아인 등 외국인들이 영국에서 돈세탁하는 창구로 활용해 온 ‘스코트랜드유한파트너쉽(SLP)’ 제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업에 있어 영국과의 확실한 연관성을 증명하고 돈세탁 리스크 등을 검사하는 에이전트 등을 통해서만 유한파트너쉽 등록 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영국 기업부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이 제도를 통해 러시아 돈 800억달러가 영국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또한 지난 2016년 1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수천개의 ‘스코트랜드유한파트너쉽’이 등록됐는데 이 모든 것의 소유주는 단 5명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017년 6월까지 10개의 주소에서 1만7000개의 SLP가 등록된 것으로 드러났죠. 영국 정부는 또한 이 제도가 동유럽의 국제범죄조직과도 연관돼 있으며 불법무기거래에서도 남용돼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